-
2월 19일, 수요일
주님께서 벳사이다에서 눈먼 이를 치유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묻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사람이 보입니다만, 나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그의 눈에 다시 손을 얹자 그가 제대로 똑바로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자기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영향을 받았던 마을입니다. 수많은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는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 그가 기억하고 있는 형태를 보면서 알 수 있습니다. 기억은 우리의 관점을 좌우합니다. 기억에는 층위가 있습니다. 기억의 세계를 지하건물로 비교한다면, 지하 1층의 기억이 있고, 지하 10층의 기억이 있고, 아주 깊고 깊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하실의 기억이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인 그저그런 일상, 특이 사항이 없는 일상에서 지하실에 기억되어 있는 힘은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지하실의 기억이 갖고 있는 힘을 가장 쉽게 알아 차릴 수 있는 때는 의심할 때입니다. 의심한다는 것은 신뢰감이 깨졌다는 것이고요. 지금까지 튼튼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들이 흔들리고 깨지면서 그 틈새로 지하실의 기억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의심으로 부터 시작된 불신은 안개처럼 혹은 연기처럼 그 사람속으로 파고듭니다. 증폭된 의심과 불신이 몸과 마음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지하실 가장 깊은 곳에 있었던, 어떤 사람을 보는 기본 관점과 그 사람에 대해 갖고 있었던 편견을 다시 한 번 보게 뵙니다. 다시 본다는 것은 말 그대로, 새롭게 본다는 말이라기 보다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재확인한다는 말입니다. 지하실 바닥에 눌러 붙어 있었던 기억, 억눌려 있었던 생각, 한쪽 구석에 쳐박아 놓았던 편견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우리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하면서 자기 나름으로 왜곡하고 각색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신의 관점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주님께서 눈먼 사람을 보게 하셨다는 것은 이런 지하실의 기억으로부터 그를 풀어주셨다는 말입니다.
살다보면,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 사람에 대한 분노가 마음속에 가득할 때, 그 분노가 내 몸속에 쌓입니다. 자기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 분노로 조금씩 병들어 가게 됩니다. 살다보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자신을 벌하기도 합니다. 여러가지 자해하게 됩니다. 칼로 자기 몸을 긋고 채찍으로 자기 몸을 후려치는 것만이 자해가 아닙니다. 극단적인 사고와 어떤 것을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고 고집스레 붙잡고 있는 것도 자해의 한 행위입니다. 자기를 꽁꽁 묶어둔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마르코 복음 5장에 마귀들린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쇠사슬과 족쇄로 무덤 사이에 묶어 두려 했지만, 이것을 끊어 버리고 날뛰면서 제 몸을 돌로 치면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구원자로 고백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을 낫게 해 주셨고 해방시켜 주신 분으로 받아들이고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 주님께서 죽음의 그늘로 내려가시어 그곳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지하실 기억속으로 내려가시어 정화시키시어 우리가 제대로 보고 움직일 수 있도록 매순간 함께 하시고 우리가 필요로 하다고 간절히 청하는 것을 들어주십니다.
"저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를 붙들어 매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으로 되돌아가지 말하는 말씀입니다. 주님과 함께 새로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