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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는 혼자다기도.영성/똘레제 2020. 1. 18. 16:08
1월 18일, 토요일
...외롭고 슬프게 느꼈던 적은 한 번 있었다. 2005년(19살) 바르샤바에서 열린 쇼팽 콩쿠르. 음악회장 로비에서 결선 진출자를 발표하던 때. 한 명씩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주인공 가족과 친구들의 환호성이 음악회장을 떠나가라 울렸다. 이윽고 " **번, 열음 손"이 불렸는데, 그 순간의 어마어마했던 정적. 새카맣게 잊고 있었던 열네 시간의 비행이 떠오를 만큼 길게 느껴졌다.
서둘러 그곳을 나서 시내 한복판의 북적이는 맥도널드에 들어가 앉았다. 자축의 햄버거를 먹으려던 순간, 유난히 작은 체구의 할아버지가 멀리서 힘에 부친듯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내 바로 앞 테이블에 앉은 할아버지는 주문대로 가는 대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한눈에 보기에도 시어 보이는, 새파란 사과였다. 그러곤 천천히 그 사과를 먹기 시작했다. 다 먹는 데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다 먹고 남은 사과를 들고는 또 천천히,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에 들어왔던 문을 열고 나가는 할아버지를 쳐다모다, 더 어릴 적에도 잘만 참았던 눈물을 그만 쏟아내고 말았다. 그날 뿐이었다. 더 이상은 혼자라는 것이 딱히 슬프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우리 피아니스트들은 특히 '혼자됨'을 잘 안다. 현악기나 관악기 주자는 '반주자'라도 대동하는데, 우리는 줄곧 혼자다. 연습할 때도, 연주할 때도, 그 사이사이에도. 많게는 2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나는 완벽하게 혼자라는 그 사실.
가족도, 친구도, 전화기도, 악보도, 아무것도 내 곁에 없는데, 나는 무조건 멈추지 말고 계속해야 된다는 그 사실. 그 사실이 더 잔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게 '산다는 것'과 너무 똑같아서다. 인생이라는 무대에 던져진 인간은 누구나 혼자다. 그러나 어쩔 수 없겠지. 예전에 내가 좋아하던 한 애니메이션의 극장판 에피소드의 제목이 그랬다. "You are (not) alone."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 손열음, 중앙북스, 2018, 317-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