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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열쇠기도.영성/다네이 글방 2019. 11. 19. 13:44
11월 19일, 화요일
어릴 때 마을 앞에 있는 동산의 소나무가 아주 크게 보였습니다. 친구들과 자주 올라갔던 뒷산도 굉장히 높아 보였습니다. 어느 날 그 소나무가 별로 크지 않고 뒷산도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소나무의 키가 줄어들었고, 산이 낮아 진 것일까요? 제가 그 소나무보다 더 큰 나무를 많이 보았고, 뒷산 보다 더 높은 산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흐름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십대 후반에 세례를 받고 크로닌이 쓴 『천국의 열쇠』를 읽었습니다. 최근에 그 책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전처럼 이야기 중심으로 급하게 읽지 않고, 천천히 읽었는데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작가의 삶이 녹아들어 있는 부분을 많이 접하면서 삶과 신앙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제가 나이가 들었거나 성장했다는 표시일 것입니다.
『천국의 열쇠』에는 프란치스 치셤과 안셀모 밀리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두 사람은 스코틀랜드 어느 마을에서 태어나 함께 자라고 함께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함께 사제서품을 받습니다. 밀리 신부는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성실하고 열정적일 뿐만 아니라, 사교성과 친화력이 좋고 조직과 행정력이 뛰어나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가난하게 살았던 치셤 신부의 관심사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과 버림받은 사람들이고,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돌보아줍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런 치셤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인정 해주지도 않습니다. 치셤 신부가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주교님께서 그에게 중국선교를 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치셤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중국 절강성 파이탄이라는 오지로 떠납니다. 『천국의 열쇠』는 치셤 신부가 선교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자신이 중국에서 겪었던 일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쓰여진 소설입니다.
중국에서 선교하고 있는 치셤 신부는 본국에서 해외 선교사들을 후원하고 있는 밀리 신부의 도움으로 성당 신축 공사를 합니다. 이 성당의 축성식을 위해 밀리 신부가 파이탄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가 오기 몇 일 전부터 파이탄에 아주 많은 비가 내립니다. 이 비 때문에 밀리 신부가 도착하기 전날 정원과 그곳에 심어두었던 모든 나무들이 모두 떠내려 가 버립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치셤 신부와 후라는 노인이 이런 대화를 합니다. “바다를 건너오시는 높은 신부님께 면목이 없어졌는뎁쇼. 제가 그렇게 정성들였던 백합을 보셨으면 몹시 기뻐하셨을 텐데...” “기운을 냅시다. 세상이 끝나버린 건 아니니까” “제가 심었던 나무는 몽땅 없어져 버렸는뎁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겠는뎁쇼” “그게 인생이라는 거요... 다 없어져버린 것 위에 다시 세우는 것이!” 안타깝게도 몇 시간 뒤에 성당 건물마저도 완전히 무너져 버립니다.
치셤 신부에게 일어났던 일과 비슷한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것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자신의 주변을 맴돌던 있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립니다. ‘한 말씀’을 부탁하고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자자 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음속에는 실패한 자신에 대한 미움과 자기에게 그런 쓰라림을 겪게 한 사람과 사회에 대한 미움이 가득합니다.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위로의 말조차 놀리는 말로 들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게 인생이라는 거요... 다 없어져버린 것 위에 다시 세우는 것이”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절망과 좌절, 불안과 두려움, 미움과 분노 등을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실패한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않고, 과거의 자기에 대해서 죽지 않으면 새롭게 시작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언어로 표현하면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살려내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고, 신비적인 죽음과 탄생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받아들여만 합니다.
어느 날 치셤은 밀리가 자신들의 고향인 타인카슬의 주교가 되었다는 편지를 받습니다. 그날 치셤은 일기에 “질투라는 것처럼 증오해야 할 것은 없다. 패배자라도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는 한, 세상 전부를 소유하고 있는 것임을 항상 기억하고 명심해야 할 것이다”라고 적습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사람이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을 평온하게 보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이 이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순간부터 불행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공한’ 친구와 나를 비교하면서, 자신이 바보같이 생각되기도 하고 인생을 허비하면서 살았던 것처럼 생각되어 가슴을 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돈과 지위와 명예가 없다면 실패한 사람 실패한 인생으로 간주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성공을 하고 다른 사람보다 앞서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치셤이 일기에 썼던 말은 패배자의 변명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느님만으로 족하며, 하느님께서 삶의 주인임을 깨닫고 평온하고 흔들리지 않게 사는 사람이 그리운 때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소유하시도록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바보같은 사람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대 데레사 성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하셨다는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 말라. 모든 것은 지나가고 하느님만이 변함없으시다.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얻은 사람은 그 외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며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라는 말로부터 힘을 얻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입니다.
35년 동안의 선교를 마치고 치셤은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아홉 살 된 안드레아라는 곱추였습니다. 안드레아는 치셤이 어렸을 때부터 사랑했지만 갑작스럽게 죽은 노라의 딸 주디의 아이였습니다. 주디 또한 안드레아가 태어나자 죽어버렸기 때문에 안드레아는 고아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치셤은 밀리 주교에게 자기 고향 본당에서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청원합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안드레아와 함께 살 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밀리 주교는 치셤 신부의 청을 들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치셤은 성당에서 “오, 하느님, 평생에 단 한 번의 소원이옵니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저의 뜻을 제발 이루어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기도의 대부분은 내 뜻이 이루어지고, 내가 원하는 시간과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세상일이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치셤의 삶과 기도는 우리의 삶과 기도와 전혀 달랐습니다. 치셤은 언제나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일을 위해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고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삶이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한 번만 내 뜻이 이루어지게 해 주소서’라는 그의 기도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전적인 신뢰에서 나온 참으로 인간적이고 진솔한 기도였음 알게 됩니다. 이런 치셤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외면하시겠습니까? 정말 오랜만에 치셤은 자신의 모든 삶을 되돌아보는 여유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안드레아에게 연어 낚시와 중국 연 날리는 법을 알려 주고, 안드레아가 스스로 “관용은 최고의 덕이며, 겸양이 그 다음이다. 하느님은 인류 공통의 아버지로다”라고 말 할 수 있게 이끌어 줍니다. (2010년, 8월 12일에 쓴 글을 수정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