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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너희가 믿느냐생활글/생활 속에서 2019. 9. 7. 09:18
9월 7일, 토요일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요한 16, 32)
하느님 절대적인 분이시다. 무조건적이시다.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에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자 하시면 하시고 그대로 이루어지는 분이시다.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것도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어떤 사람을 부르는 것도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도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런 것을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하느님이시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개인으로서 대하시고 부르시고 그에게 소명을 주신다. 이런 모든 과정에 조건이 없이 하신다. 이런 분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도 조건이 있을 수 없다. 절대적인 분과 절대적인 부름과 소명에는 절대적인 응답이 있을 뿐이다. 저마다 자기에 맞는 부름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맞는 응받을 하게 된다. 이런 응답으로 그의 구체적인 삶의 형태가 주어지게 된다. 이것이 하느님의 부름인지 아니면 개인의 욕구인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인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주님의 영이 다스리고 이끌오 있는 가시적인 교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교회는 단지 사람들의 모임이나 어떤 건물만을 말하지 않는다.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성령의 궁전이시다. 따라서 교회로부터 공적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택한 삶의 형태가 바로 주님의 부름과 소명에 의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수도자들은 이런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한 구체적인 삶의 형태로 공동체와 더불어 생활하고, 개인적으로는 정결과 청빈과 순명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소명에 응답하는 사람들이다. 이 수도자의 삶이 하느님의 뜻에 응답한 것임은 교회의 받아들임에 기초하지만, 생활속에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보면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 수도자가 정결과 청빈과 순명 서원을 실행하기 위해 자기가 감당해야 할 희생보다는 그런 삶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거룩한 사람으로 보여지느냐 그리고 그들에게 거룩하게 살 수 있도로 영향을 주느냐에 더 큰 비중을 두어여 한다.
수도자는 왜 서원을 하느냐라고 물을 수 있다. 그것은 절대자이신 하느님, 무조건적으로 자기를 부르신 주님께 자신을 조건없이 드리는 행위이다. 그 외에 여러가지 이유들을 만들고 찾을 수 있겠지만, 그것들은 절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응답이라는 것에 대한 부연 설명일 뿐이다. 이 서원을 살아가는 여정에서 자신의 약함으로 서원의 삶에서 비껴 있을 때가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다시 주님께로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서 그리고 다시 주님께 발걸음을 돌리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적의 의심과 회의도 있을 수 있다. 믿음에 도전하는 순간일테고, 혼란과 동요가 따라오게 된다. 이런 때라도 자신의 부족함을 성령님게서 채워주시고, 주님께서 자신으 붇을어 주신다는 것에대한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된다.
이런 것들은 공부와 교육을 통해서 모두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소화되고 자신의 일부로 되기까지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그전에는 믿지 않았는데 지금은 믿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세례를 받고 교회의 전례와 기도에 참석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으로 믿음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제서야 너희가 믿느냐?"라고 응답할 때의 믿음은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구원자로,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의 아들로, 절대적인 분이시고 무조건적인 분이시라고 모셔들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