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나에게 쓰라고 말하지 않았다. 쓰지 않고서 살 수 없는 그런 상태도 아니다. 밥벌이를 위한 것도 아니다. 업무상 하루에 일어난 일을 기록할 필요도 없다. 글을 쓰면서 성장하고 성숙한다는 말들을 많이 하지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글로 읽었을 때의 기쁨이 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렸을 때 일기를 써보긴 했지만, 오래 전에 그만두었다. 습관적으로 쓰는 게 아리라는 말이다. 생각을 쓴다고 하지만, 생각하는 모든 것을 어떻게 다 쓴단 말인가. 생각에 대한 취사선택을 해야 하는데 그런 일을 하기 싫다. 브레인 스토밍처럼 두서없이 생각이 떠오르는대로 몇 분 끌적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학술적인 글쓰기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고 있다. 나오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기 때문이다. 강론쓰기도 마찬가지다. 될 수 있으면 강론할 기회를 피하고 싶고, 강론에 대해 쓰는 것도 싫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방 사람들에게 왜 글을 쓰라고 압력을 주고 있는가. 글을 쓰면 어떤 것이 좋은지에 대해 확신도 없으면서. 글을 쓰면 좋다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믿으며 그대로 실행해보라고 강권하고 하고 있단 말인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지금도 무엇인가 쓰고 있지 않는가? 왜그럴까? 말할 상대가 없어서 글로 쓰는가. 구태여 말할 것도 없는데, 말을 하고 글로 무엇인가 쓴다는 건 쓰레기를 만드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 쓰는가? 시간을 죽위기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은 신나는 영화를 보는 것이지 않은가. 외로워서 글을 쓰는가. 그럴 수 있다. 외롭다는 것은 홀로있음인데, 글을 쓰는 순간 만큼은 홀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닌 또 다른 나에게 말을 하는 것이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나서 외롭지 않았던가. 그런 적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외로움이 더 도드려졌을 뿐이다. 외로움의 시간을 고통스러운 것이라 한다면, 고통의 순간을 잠시 잊기 위한 글쓰기라는 말에는 공감한다. 외로움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더 외로워지는 법이다. 수렁에 빠진 사람이 수렁에서 나오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수렁속으로 빠져들듯. 그럼에도 왜 수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있었을까? 하느님의 창조행위에 동참하기 위해서였을까? 문자로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재미때문이었을까? 자기만족감에 글을 쓰기도 한다. 나르시스가 연못에 비친 자기 얼굴에 빠져들듯, 자기가 쓴 글을 보며 스스로 감탄할 때가 있지 않았던가. 오래전에는 기차자 버스를 타면 으레 잠을 잤다. 얼마전부터는 이것이 불가능해졌다. 오늘은 서울 오가면서 기차안에서 졸거나 잠을 잤다. 밤에 자지 못한 잠을 기차안에서 잔 것이다. 잠잘 수 없는 일에 대해 왜 이리 불안해 할까? 잠에 매여있는 상태다. 잠을 자지 못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삶이 파탄날 것처럼 생각한다. 세상에 잠을 못자 뒤척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잠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에서 내가 마음대로 할 수없는 시간대로 넘어가는 것이다. 잠이 오는 것에서 부터 잠자는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잠이 오는 것도 손님이 오시는 것처럼 말없이 어떤 순간에 온다. 잠안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학자들이 이렇게 저렇게 말하지만, 확실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때는 밤의 고요함과 적막함이 너무 좋아 잠자기를 아까워했던 때도 있었다. 그렇제 지금은 모든 관심사가 잠에 쏠려있다. 오늘 저녁에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을까? 약 도움없이 잘 수 있을까. 오늘 저녁 글쓰기에서 부터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그와 아무럴 관련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생각이 그렇게 흐른 것이다. 지금은 약간 졸음이 온다. 자야하나, 말아야 하나 이것 하나 자유로이 선택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사람이 소심해진 것인지, 자신감이 없어진 것인지, 신중해진 것인지, 잘 모르겠다. 생각이 떠도는 것은 삶이 불안정하다는 말이다. 정신을 모을 수없기 때문에 힘있는 말도 글도 나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쓴 글을 보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대충 그릴 수 있다. 글과 말이 자신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옷과 표정과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지만 부족한 점이 많다. 이것을 보충하기 위해 글을 쓴다. 글로 풀어놓는다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실타래를 풀듯이 글로 자신의 삶을 풀어놓는 것이다. 두 사람이 한 행위라도 각 사람은 다르게 기억한다.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팩트의 세부적인 사항을 달리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도에 따라서도 기억하기도 한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글을 쓸 때, 그 흐름을 왜곡한다는 것은 진실되이 쓰지 않았을 때이다. 몇년 전의 나의 상태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몇달 전의 내 상태와 비교한다. 분명 나자신이지만 짦은 시간에 너무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에, 서로 낯설다.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내적 체험을 한 것이다. 쉽게 말해 고통받은 것이다. 고통받는다는 것은 역풍을 받으며 항해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비교적 순탄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맨탈’이 약해졌음을 알게되었다. 시련을 겪으면서 맨탈이 강해진다. 믿음은 혼란과 역경을 겪고 난 다음에 주어지는 결과물이다. 물론 믿음은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지만, 내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는데, 믿음이 커지거나 자라지는 않는다. 몇달 전까만 하더라도 새벽에 일어나는 일이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먼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옛날 일로 되어버렸다. 예리고의 성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듯, 한순간에 맨탈이 붕괴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