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게네스는 하느님의 궁극적 불가지성이란 개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사람으로 생각된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하느님을 아는 것' 또는 '하느님을 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에게 '하느님을 아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에게 알려짐을 뜻하는 바, 하느님은 당신을 아는 이들과 결합하시어 당신의 신성을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신성을 가지게 됨'이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되찾게끔 우리 스스로를 바꾸는 것, 우리가 다시 하느님을 닮아 원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기까지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서양 신비 사상의 기원>, 118)
*** ‘하느님을 앎’이라는 오리게네스의 이런 의견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성경 이야기는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대화입니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라고 말씀하십니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보여지는 것’은 예수님 신성의 빛이 나타나엘에게 들어갔다라는 말이고, 이 빛을 통해 나타나엘이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타나엘이 예수님에 의해 보여지기 전에 보였던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라는 태도를 즉시 바꾸어,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눈에 보여지게 하는 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길이며, 주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고 고백하게 됩니다. 영원한 침묵 안에서 고요하게 머무는 것, 성체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마음속으로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우리가 그분의 눈에 보여지게 하는 것이고, 그분에게 우리를 노출시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