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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생활글/생활 속에서 2022. 6. 20. 22:36
오랜만에 일찍 일어났다. 아침 묵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서울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아침에 갔다가 오후에 내려오기로 했다. 어제 저녁 먹은 치킨때문에 아침식사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과일과 이거저것을 대충 먹었다. 아침에 여행을 하려 할 때마다 어떤 기시감에 빠지곤 한다. 안식년 때 아무도 반기지 않았던 곳에서 하룻밤 묶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새로운 곳을 찾아 새벽 일찍 버스 터미널이나 기차역으로 떠나던 때가 오러랩되곤 하는 것이다. 그때와 전혀 다른 상황인데, 왜 그런 기시감이 일어나는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보건소 앞마당에 주차를 하고 버스를 탔다. 첫차라곤 하지만 해가 일찍 뜨기 때문에 새벽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산속을 가로질러 계곡을 건너고 터널과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산이 많기도하다는 생각이 새삼스럽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었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임윤찬의 연주다. 멋진 연주라는 생각을 하지만, 왜 최고라는 찬사를 받는지 잘 모르겠다. 어떤 것에 대해 평가를 한다는 것은 그 분야에 대해 일가견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과 저것을 비교한다는 것도 그 분야에 대해 상당한 깊이가 있다는 말이다. 계속 듣다보면 소리에 민감해 지고 소리에 대한 어떤 감각이 생기리라 생각한다. 소리와 음악에 대해 공부하면서 듣는다면 훨씬 나은 감상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직까지는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다. 남아있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서울 들어올 때 조금 막혔지만, 아침 출근 시간인 걸 감안하면 많인 밀린 것도 아니었다. 지하철을 공짜로 탈 자격이 있어, 공짜표를 구하려고 몇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바로 옆 자판기에서 나와 똑같은 사람이 있었다. 나에게 어떻게 구하는지 물었지만 도와줄 수가 없었다. 5백원 동전이 있어야 하는가 보다 하며, 두 사람 모두 포기했다. 진료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성당에 가서 잠깐 앉아 있었다.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정도의 긴장은 아니지만, 살짝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의사들이 잘 하는 말대로, "괜찮습니다"라고 할 수도 있지만 "뭔가 이상한 징후가 보이는데요"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 머릿속을 보며 설명해 주는 의사의 말을 무덤덤하게 듣고 있었다. 내 머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머리, 나와 아무런 관련없은 어떤 영상을 보는 것 같았다. 책에서 가끔 보았던 뇌의 사진과 다른 것이 없었다. 호두 알맹이처럼 생긴 하얀 뇌 본체가 보이고, 복잡한 전기줄처럼 얽혀 있는 혈관들. 이들 사이에서 별 이상을 발견하지 못하겠다고, 마스크를 써서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지만 상당히 젊은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나도 물어볼 것도 없어, 진료실을 나왔다.
서울에 온김에 편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뭔가 없을까 찾아보고 싶었다.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저장해 놓았다 듣고 싶을 때 언제든지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얼마 전까지 유행했던 mp3와 같은 것. 요새는 스마트폰안에 모든 것들이 다 있어 좋은 점도 있지만, 그 기능을 익히기가 쉽지 않아 미리 포기해 버리는 것이 많았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아이폰은 음악 저장 기능이 어디에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고, 그 기능을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동서울 터미널 근처에 있는 테크노마트에 가보기로 했다. 그곳에서 mp3를 보고 마음에 들면 구입하기로 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요새는 mp3와 비슷한 새로운 제품이 나오지 않으며, 옛날 것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가게 주인이 보여주고 추천하는 것도 허접해서 마음이 끌리지도 않았다.
예약한 버스 시간이 두 시간 넘게 남아 있었다. 다시 경부터미멀로 갔다. 점심도 먹고, 서울 나들이 한 김에 책방에 들러 출판동향을 살펴보고 싶었다. 신세계 지하에 있었던 영풍문고 대신에 헬스클럽이 들어서 있었다. 버스를 기다릴 때 시간 죽이기에는 그만이었던 서점이어서 자주 사용하곤 했는데, 문을 닫은 것이다. 하기야 누가 호화스런 백화점에 와서 책방에 들르겠는가. 그리고 그 비싼 땅에서 책방을 해서는 가겟세도 제대로 내지 못했을 것이니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터미널 의자에 앉아 아침 버스안에서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들었다. 시간 죽이기에는 클래식 음악 듣기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려오는 버스안에서도 음악을 듣거나 기도를 했다. 서울의 윗쪽에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려간다, 서울로 올라간다라고 말한다.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사고임에 틀림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북쪽에서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갈 때에도 예루살렘으로 올가간다라고 말하는 것고 같은 이치다. 아침 테레비에서 장마가 시작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것 같았는데, 아주 맑은 날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바로 바닷가로 갔다. 월요일이어서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서핑하는 젊은이들과 가족들과 연인처럼 보이는 몇 사람이 전부였다. 바닷가 모래밭을 걷고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모래밭에 앉아 파도 소리를 듣고, 맑은 공기를 머리속과 폐 깊숙한 곳까지 들이마시고... 몇 주 전까지 생활했던 것이 까마득한 옛날처럼 생각된다. 빈틈 하나없이 빡빡하게 지냈던 지난 성주간이 생각나기도 했다. 이렇게 하면서 몇 달을 보냈고, 스트레스의 강도는 다르지만 몇 년을 그렇게 지냈다. 일과 관계해서 그리된 것도 있지만, 산다는 것은 긴장과 갈등을 일으킨다는 말이기 때문에, 당연히 감당해야 할 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같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작심삼일이라고 이것이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남은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자. 일에 대해서든 사람에 대해서든 욕심 부리지 말고, 되어가는 대로 맡기며 따라가자. 지금까지 밀어붙이면 된다라고 여겼던 태도에서 일이 되어가는 것을 따라가자. 다른 사람에 말했던 것은 그 사람에게 맡겨두자. 옳든 그르든, 화려하든 초라하든 내 삶은 내 삶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자... 해가 대청봉을 넘어가지 않았지만,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집으로 가야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