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양양에서 광주로 왔다. 비행기가 없을 때는 아침에 출발하면 저녁에나 도착하는 곳이었다. 거리가 먼 탓도 있지만 동해안과 광주 사이에 교류가 많지 않아 교통편 또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행기로 왔기 때문에 편하고 빨리 올 수 있었다. 양양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공항, 양양에서 한시간 거리에 있는 광주, 공항에서 이곳까지 택시로 오는데 30분 정도 걸렸다.
광주에 도착하면서 가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양양에는 사방이 소나무여서 사철 푸르기 때문이었다. 오죽 했으면 양양에서는 소나무가 아니라면 나무로 쳐주지도 않는다라는 말을 했겠는가? 멀리 대청봉이 있지만 단풍은 아직 이르고, 소나무와 소나무 사이에 단풍을 볼 수 있는 활엽수들이 있긴 하지만 거의 없는 것과 같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광주 이곳으로 이사올 때가 기억난다. 화정동에서 지내다가, 그곳이 개발되면서 수도원이 도시 한 가운데 있는 상황으로 되었기 때문에 좀 더 한적한 곳으로 이사를 왔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곳은 도회지의 외곽지대였다. 시내버스 종점에서 내려 20분 정도를 걸어야 했고, 수도원 앞에 버스기 있기 하지만 한 시간에 두세 번 있었기 때문에 불편했다. 시간이 흐르고 도시가 확장되면서 주변 지역이 쓰레기 장으로 되었고, 아파트 단지로 둘러쌓이게 되었고, 앞으로 넓은 도로가 뚤리면서, 몇십년 전의 화정동과 비슷하게 시끄러운 곳으로 변해버렸다. 창립자께서 수도원을 지을 때 가장 중요시하게 여겼던 한적하고 고독한 장소와 상당히 먼 곳에서 살고 있는 상황이다.
오랫만은 아니지만 형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두 사람이 만날 때 메뉴는 언제나 소주와 삼겹살이었다. 평범한 한국 사람들이 식사와 술 한잔 할 때 가장 무난한 메뉴라 생각한다.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함께 있고, 함께 식사하면서 한잔한다는 그 자체가 좋은 것이다. 젊었을 때 느끼지 못했던 편안함이 있어 그냥 좋을 뿐이다.
형님과 헤어져 돌아오면서 다른 형제들이 모여있는 곳에 함께 했다. 코로나 때문에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서 그런지 반가운 사람들이었다. 형님과 이야기할 때와 똑같이 새로운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같이 살고 있는 형제들과 함께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하고, 섭섭했고 실망했던 이야기, 긴장하고 갈등 상황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른 형제들에게 하는 것 자체로서 마음의 짐이 가벼워지는 것처럼 여겨졌다.
아침기도를 함께 하지 않고, 주일이기 때문에 늦잠을 잤다. 아침식사를 건너뛰고 회의를 시작했다. 언제들어도 돈과 숫자에 관한 이야기는 재미없다. 반면에 신경은 날카로워진다. 일상생활속에서 천원이난 만원 정도는 크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숫자상의 오류가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 아주 큰 실수처럼 생각하곤 한다. 그것에 대해 잘 명쾌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점심먹고 두시에 수도회 창립 300주년 기념미사를 했다. 이곳 교구의 주교님이 오셨고, 우리 수도회와 관련된 손님들이 제법 많이 오셨다. 대부분 코로나 백신 접종을 했을 것이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거리두기를 한 상태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없는 것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언젠가 말했다. 고난에 대해서 고난의 기억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퍼뜩 떠오르지 않은 것은 그에 대해 깊은 성찰과 묵상과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리라. 더불어 어떤 주제에 대해 열정적으로 투신하지 않는 것은 그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했다. 사랑은 열정적인 삶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에 열정적으로 투신하지 않고 어정쩡한 생활을 했던 것 같다.
코로나 때문인지 덕분이지 모르겠으나, 미사를 마치고 축하식이라던가 다과시간을 갖지 않고 헤어졌다. 깔끔하게 끝낼 수 있었지만, 뭔가 아쉽고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서울 교구 주보에 글방에 관한 홍보를 했고, 그것을 보고 글방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오고 있는 상황이다. 몇 년 전에도 똑같은 내용으로 홍보를 했는데, 그때와 사뭇 다른 반응을 보고 약간 놀라고 있다. 책을 읽고 글쓰기에 대해 관심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말이다.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이기 때문에 관심자들이 많은 것 같다. 책을 읽는 사람이 없다고들 하면서 걱정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상황에서도 책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는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처럼 여겨진다.
다시 밤이 되었고, 낮과 전혀 다른 침묵과 고요속으로 되돌아 왔다. 쉼의 시간이고, 정리하고 정리되는 시간이며, 낮에 억눌려 있던 것들이 무엇인든 그들이 활개를 치는 시간이 되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부지런히 움직였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