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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과 진리와 생명말 씀/생명의 말씀 2021. 4. 30. 23:18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사람이라도 한주번 쯤은 들어보았을 말씀이다. 너무나 눈에 익고 귀에 익어서, 신선한 맛이 떨어져버린 말씀이다. 말씀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그 깊은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맹숭맹숭한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매일 길을 걷고 있지만, 길의 고마움에 대해 모른다. 길이 으레 거기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누군가 길을 내었고 만들었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것이다.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미지의 영역으로 발을 옮길 때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떠났을 것이다. 자기 뒤에 누가 따라오리라는 위안을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기가 가야할 길이기 때문에 걸어갔을 뿐. 뒤이어 수많은 사람이 따라가면서, 지금과 같은 길로 되었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과 길은 언제가 함께 한다. 다른 곳을 걷은 것이 아니라 바로 길을 걷기 때문이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임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자기가 걷고 있는 길이 자기를 어디로 인도할 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런 면에서 길을 나보다 먼저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내가 길을 만들며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그러나 내가 볼 수 없었던 그 길을 걸을 뿐.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빌라도가 물었다. '진리는 나의 빛이다', 어떤 대학교의 로고에 새겨져 있는 말이다.그곳에서 말하고자 했었던 진리는 무엇이었을까? 진리는 과거형으로 말하면 이미 진리가 아니다. 언제가 영원한 현재로 존재해야만 하는 진리다. 학문분야에서 가끔 말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 지식에 관한 언술이다. 새로운 지식이 나타나면 지금까지 진리라고 믿었던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추상성을 띠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구체성과 현실적인 것에 적용될 수 없는 것은 허황된 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추상성과 구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을 진리라고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도 변함없이 통용되는 것이 진리이다. 요지부동이지만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유연함을 지니고 있다. 진리는 발전하는 것인가? 발전한다는 것은 변화된다는 말이고, 변화된다는 것은 유한함이며, 유한한 것은 소멸된다는 말이고 진리가 소멸되어서는 진리라고 할 수 없는데. 진리의 역동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원한 성장과 변화가 진리의 특징인가?
생명은 신비로움 자체다. 주변어디에서든 생명 현상을 볼 수 있다. 너무도 생생한 현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미시계와 거시계의 생명권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생명은 추상적으로 다가온다. 철학이나 형이상학으로 넘어가며, 물질계와 정신계를 넘나든다. 예수께서 당신을 생명이라 말씀하신 것이 무슨 뜻일까? 어떤 현상을 말씀하신 것일까? 무엇을 지향하며 하신 말씀일까? 생명체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생명이 무엇인지 잘 모르면서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그분의 현존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너무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 같아 마음에 차지 않지만, 그렇게 밖에 말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