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나 사랑해?” “그럼.” “얼마나 사랑하는데?” “아주 많이, 하늘만큼.” 이렇게 말하면서 아이를 꼭 안아줍니다.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고, 마음놓고 뛰어놉니다.
어른들의 사랑 확인과 사랑 표현 방법은 조금 다를 것입니다. 어떤 여자가 남자에게 묻습니다. “저를 사랑하세요?” “예.” “얼마나 사랑하나요?” “아주 많이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 ??? ”
사랑의 양을 어떻게 측정 할 수 있을까요? 흔히 말하듯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사랑의 마음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요? 어쩔 수 없이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사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돈많은 남자들이 값비싼 물건으로 사랑 공세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면 가진 돈도 많지 않고, 권력도 없고 힘도 없고, 내세울 것도 별로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자기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제3자도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까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시간을 내어준다는 것은 함께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은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의 양과 비례합니다.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이 많고 길수록 사랑이 깊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젊었을 때 결혼하여 나이들어 거동할 수 없을 때까지 함께 했던 노부부의 사랑의 깊이를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함께 한다는 것과 직결됩니다. 시간이란 어떤 사건과 사건의 길이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일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을 때 우리는 시간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일들을 우리는 희로애락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과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시간이 많고 길면 길수록 서로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 수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되돌아봅니다. 사랑한다는 헛 말만 되풀이 하지 않았던가? 내가 사랑하고자 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면 사랑하리라고 말 하면서 아직 까지도 찾고만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분께 나의 시간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그 자체가 그분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성무일도 하는 시간과 전례를 거행하는 시간이 그분과 아주 구체적으로 함께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하느님과 함께 한다고 의식하면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일이든. 먹고, 일하고, 공부하고, 사람들은 만나고, 걷고, 쉬고... 이런 평범한 모든 일들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행위였음을 깊게 믿고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