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째 되는 날 나는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뚜렷한 목적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펜을 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 생애에서 결정적인 순간이 되었다... 나는 어휘들을 동원하고 읽었던 시와 성자들의 전기와 소설들을 되내뿜었는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여기저기서 훔쳐 가며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맨 처음 종이에다 적어 놓은 어휘들을 보고 나는 놀랐다. 나는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가지고 살지 않았었다. 나는 그런 내용들을 쓰기를 거부했었는데, 어째서 그것을 썼을까?... 글을 쓰면서 나는 으쓱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내 기분에 맞도록 현실을 멋대로 변형시키던 나는 신이 아니겠는가? 나는 분리 시키기가 불가능할 만큼 진리와 거짓을 함께 뒤섞었다... 나는 며칠 사이에 작품을 끝냈다. 원고를 모아서 나는 빨간 비잔티움 글자로 <뱀과 백합>이라는 제목을 써넣었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심호흡을 했다. 에리에 아가씨는 이제 나를 괴롭히지 않았고 종이 위에 누운 그녀는 절대로 다시는 종이에서 떨어져 나오지 못하리라. 나는 구원되었다! ... 현실과 상상, 창조하는 신과 창조하는 인간 사이의 투쟁은 얼마 동안 내 마음을 도취시켰다. ‘내가 갈 길은 이것이고 이것이 내 의무이다’. 빗속에서 오락가락하며 나는 마당에서 소리쳤다. 인간은 저마다 맞서 싸울 적의 정체를 결정짓는다. 비록 그것이 파멸을 뜻할지언정, 나는 신과 싸우게 되어서 기뻤다. (<영혼의 자서전> 191-193)
* 운명처럼 다가오는 어떤 사건이 있다. 외적으로 큰 사건일 수도 있고 그저 그런 평범한 일일 수도 있다. 자기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꾸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과의 만남이 있다. 그 사람을 어떻게 만났게 되었는지 따질 수가 없다. 그 사람과의 만남이 가능하게 했던 외적 요인들은 그저 말을 하기 위해 찾아낸 것일 경우가 많다. 어떤 책과의 만남도 운명처럼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책에 저자의 혼이 담겨있는 경우에 간혹 일어나는 일이다. 이렇게 운명적으로 만났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이 만남 후에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떤 남자 혹은 여자와 운명적으로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한 그 순간부터 투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순간부터 그분과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하며 틀림없다. 이렇게 투쟁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가는 것이며 위로 올라가는 것이며 어둠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