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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알베르 카뮈/김화영, 민음사, 2020
* 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자기 진찰실을 나서다가 층계참 한복판에서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목격했다. (17)
* 장 타루의 얼굴은 오랑 시에서 점차로 익숙해지고 있었지만 그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 왜 그곳으로 온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타루가 사람이나 사물을 어느 정도 초연한 시선으로 바라보려고 앴느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었다. (37)
* 타루가 기록한 리유의 모습이다. 서른다섯 살쯤 되어 보인다. 중키, 딱 벌어진 어깨, 거의 직사각형에 가까운 얼굴, 색이 짙고 곧은 두 눈이지만 턱뼈는 불쑥하게 튀어나왔다. 굳센 콧날을 고르다. 아주 잛게 깎은 검은 머리, 입은 활처럼 둥글고, 두꺼운 입술을 거의 언제나 굳게 다물고 있다. 햇볕에 그의 피부, 검은 털, 하결같이 짙은 색이지만 그에게는 잘 어울리는 양복 색 같은 것이 어딘가 시칠리아 농부같은 인상을 준다. 그는 걸음걸이가 빠르다. 그는 걸음걸이른 바꾸는 법도 없이 보도를 걸어 내려가지만 세 번이며 두 번은 가볍게 껑충 반대편 보도로 올라간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는 방심하기 일쑤여서, 길모퉁이를 회전하고 난 뒤에도 깜박이를 끄지 않은 채 가고 있다. 늘 모자를 쓰지 않은 맨머리다. 세상사를 혼히 다 꿰뚤어 보고 있는 듯한 표정. (44)
*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54)
* 우리 시민이 딴 사람들보다 잘못이 더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겸손할 줄을 몰랐던 것뿐이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아직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재앙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추측했던 것이다. 그들은 사업을 계속했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미래라든가 장소 이동이라든가 토론 같은 것을 금지해 버리는 페스트를 어떻게 그들이 상상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55)
* 죽은 사람이란 그 죽은 모습을 눈으로 보았을 때에만 실감이 나는 것이어서, 오랜 역사에 걸쳐서 여기저기 산재하는 일억의 시신들은 상상속의 한 줄기 연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56)
* 페스트에 휩쓸린 아테네 사람들이 바다 앞에 드높이 세워 놓았다는 화장터의 장작더미들을 생각했다. 사람들은 밤에 그곳으로 시체들을 옮겼는데 자리가 모자라서 산 사람들은 서로 자기들이 아끼는 이들의 시신을 그곳에 갖다 놓으려고 햇불을 휘두르며 다투었고, 자기들의 시체를 포기 하느니보다는 피투성이가 되면서라도 싸워 이기려고 했다. (59)
* 마음먹은 것을 시원하게 표현할 수 있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어요. (그랑이 리유에게 한 말, 67)
* 아닌 게 아니라 유행병이 수그러져 가는 듯 싶었다. 며칠 동안 사망자의 수는 불과 십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병이 급속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사망자의 수가 서른 명으로 늘어난 날, 리유는 '저들이 겁을 먹었소'하며 내미는 전보 공문을 받아 읽었다. 전보에는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고 적혀 있었다. (89)
* 시의 문들이 폐쇄되자 그들은 모두 같은 독 안에 든 쥐가 되었으며 거기에 그냥 적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질병의 무지막지한 침범은 그 첫 결과로서 우리 시민들을 마치 사적인 감정 같은 것은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94)
* 우리들의 생활을 이루고 있던 감정, 더구나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전에는 물랐던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배우자를 퍽 끔찍하게 믿어 오던 남편들이나 애인들이 문득 질투심에 사로잡혀 버리는 것이었다. 사랑을 가볍게 여긴다고 스스로도 인정하던 남자들이 다시 성실해졌다. (97)
* 페스트가 우리 시민들에게 가장 먼저 가져다둔 것은 귀양살이였다. 그때 우리가 끊임없이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던 공동, 과거로 돌아가고만 싶은 혹은 그 반대로 시간의 흐름을 재촉하고만 싶은 구체적 감정, 어이없는 요구, 저 불타는 화살과도 같은 기억, 그것이 바로 귀양살이의 감정이었다. 우리는 결국 우리의 감금된 상태로 되돌아와서 오로지 지나온 과거만 바라보고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98)
* (레몽 랑베르와 리유의 대화) "나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닌데요!" "지금부터는 유감입니다만, 선생은 이 고장 사람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117)
* 리유는 이제 더 이상 동정심과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동정이 아무 소용이 없다면 동정하는 것도 피곤해지는 법이다. (123)
* (파늘루 신부의 강론) 오늘 페스트가 여러분에게 관여가헤 된 것은 반성할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사람은 그것을 조금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이 세상은 악과 타협해 왔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이 세상은 성스러운 자비 위에서 안식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는 것으로 충분했고, 모든 것은 허용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주일에 하느님을 찾아 뵙기만 하면 나머지 시간은 자유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 충고나 우애의 손길이 여러분을 선으로 밀어 주는 수단이었던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하느님보다 더 서둘러서는 안 되며, 어쨌든 하느님이 이룩해 놓으신 영구한 질서를 앞당기려 한다는 건 이단으로 가는 것입니다. (128-134)
* (그랑이 리유에게) 선생님 엄밀하게 말해서 '그러나'와 '그리고' 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는 퍽 쉬운 편입니다. 그런데 '그리고'와 '그 다음에' 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가 되면 벌써 문제는 더욱 어려워지죠. '그다음에'와 '이어서'가 되면 어려움은 더해 집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곤란한 것은 '그리고'를 쓸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일이죠. (139)
* (리유) 파늘루는 학자입니다. 그는 사람이 죽은 것을 많이 보진 못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리 운운하는 것이죠. 그러나 아무리 보잘것없는 시골 신부라도 자기 교구 사람들과 접촉이 잦고 임종하는 사람의 숨소리를 들어 본 사람이라면 나처럼 생각합니다. 그는 그 병고의 유익한 점을 증명하려 하기 전에 우선 치료부터 할 것입니다. (169)
* 사람은 자기 눈으로 볼 수 없으면 어떤 고통을 참으로 나눌 수 없다는 저 가공할 무력감을 그 음성들은 동시에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185)
* 이와 같이 매주일 계속해서 그 페스트의 포로들은 저마다 제주껏 발버둥을 쳤다. 그리고 그들 중 랑베르를 포함한 몇몇은 보다시피 아직도 자유인으로서 행동하고 있었으며, 아직도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상상하기까지 했다. (221)
* 같은 시내에서도 특히 피해가 심한 구역을 격리하고 직무상 불가피하다고 생각되는 사람 이외에는 외출을 금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그때까지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로서는 그러한 조치가 유나스럽게 자지네들에만 불리하게 취해진 일종의 약자 학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상 나보다 더 부자유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무렵에 품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을 요약하는 표현이었다. (223)
* 기억도 희망도 없이 그들은 현재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실 모든 것이 그들에는 현재로 변해 버렸다. 페스트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의 능력을 심지어 우정을 나눌 힘조차도 빼앗아 가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도 말해야겠다. 왜냐면 연애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미래가 요구되는 법인데, 우리에게는 이미 현재의 순간 이외에는 남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239)
* 9월과 10월 두 달 동안, 페스트는 도시 전체를 ㄹ바기 발밑에 꿇어앉혀 놓았다. (247)
* 리유는 자기가 얼마나 피곤한가를 판단할 수 있었다. 그의 감성이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에 맺히고 딱딱해지고 매달라 있던 감수성이 때때로 풀어져서, 걷잡을 수 없는 감정 속에 리유를 몰아넣곤 하는 것이었다. 그의 유일한 방비는 그 딱딱한 상태 속에 피신하여 자신의 내부에 형성되어 있는 그 매듭을 다시 한 번 단단히 졸라매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만이 계속 견뎌 내기에 가장 좋은 방법임을 잘 알고 있었다. "참 인정이 없군요."하고 누군가 어느 날 그에게 말했다. 천만에 그는 인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인정으로 해서 그는 매일 스무 시간을 살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이 죽어가는 광경을 참고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인정으로해서 그는 매일 닽은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251)
* 재앙에 맞서서 투쟁을 계속하는 사람들에게 차츰차츰 밀려들고 있는 탈진 상태의 가장 위험한 결과는 외부의 사건이나 타인의 정서 같은 데에 대한 무관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는 무성의에 있는 것이었다. (253)
* "선생님." 랑베르는 말을 꺼냈다. "나는 떠나지 않겠어요.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있겠어요." 타루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운전을 하고 있었다. 리유는 피로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럼 부인은요?" 하고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랑베르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는데 자기 생각에 변함은 없지만 그래도 자기가 이곳을 떠난다면 부끄러운 마음을 지울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남겨 두고 온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것도 거북해지리라는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랑베르가 말했다.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나는 늘 이 도시와는 남이고 여러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러나 이제 볼 대로 다 보고나니,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나도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알겠어요. 이 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관련된 것입니다."( 272)
* 햇빛이 방안으로 가득 흘러 들어왔다. 다른 침대 다섯 개 위에서는 여러 형체들이 꿈틀거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 같이 약속이라도 한듯이 나직한 신음 소리였다. 방의 저 끝에서 고함을 치고 있는 단 한 사람의 환자만이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고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놀라움을 나타내는 듯한 짧은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리유는 가끔다가 딱히 그럴 필요성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현재 자기의 무력한 부동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린애의 맥을 짚어 보곤 했는데, 눈을 감으면 그 요란한 맥박이 자기 자신의 동요와 뒤섞이는 것을 느꼈다. 그때 그는 고통 받는 어린애와 한 몸이 된 것을 느꼈으며, 아직 몸이 성한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서 그 애를 지탱해 주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일치되었다가도 두 사람의 심장 고동은 다시 엇갈려 어린애는 그만 그에게서 빠져나가는 것이었고, 그러면 그는 그 가느다란 손목을 놓고 자기 자리로 되돌아오곤 하는 것이었다. (281)
* 그 손이 다시 올라가서 무릎 근처의 담요를 긁었고 갑자기 어린애는 두 다리를 꺾더니 넓적다리를 배 근처에 갖다 대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는 이때 처음으로 눈을 뜨고 앞에 있는 리유를 보았다. 이제는 잿빛의 찰흑처럼 굳어 버리고 만 그 얼굴의 움푹한 곳에서 입이 벌어졌다. 그러더니 곧 한 마디의 비명, 호흡에 따른 억양조차 거의 없이 갑자기 단조로운 불협화음의 항으로 가득 채우는 인간의 것이라기에는 너무나도이상한 , 마치 모든 인간들에게 한꺼번에 솟구쳐 나오는 것만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리유는 입을 악물었고 랑베르는 카스텔 곁의 침대에 가까이 갔고, 카스텔은 무릎 위헤 펼쳐져 있던 책을 덮었다. 파늘루는 병 때문에 까맣게 타버린 채 모든 시대의 비명으로 가득 차 있는 그 어린애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슬며시 무릎을 꿇더니 나직한 그러나 그치지 않고 들리는 그 이름 모를 신음 소리들 틈에서도 똑똑히 알아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아무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느님이시여, 제발 이 어린애를 구해 주소서!" (282)
* (리유가 파늘루 신부에게) "이 애는 적어도 아무 죄가 없었습니다. 당신도 그것은 알고 계실 거예요!" 그러더니 그는 몸을 돌려 파늘루보다 먼저 방문들을 지나 교정의 구석으로 갔다. "이해합니다." 파늘루가 중얼거렸다. "정말 우리 힘에는 도가 넘치는 일이나 반항심도 생길 만합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닙니다, 신부님."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고 있어요. 어린애들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 놓은 이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 파늘루의 얼굴에는 당황한 그림자가 스쳤다. "아, 선생님."하고 그는 서글프게 말했다. "이제 방금 나는 은총이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깨달았어요." ... 리유는 웃는 낯을 하려고 노력했다. "인간의 구원이란 나에게는 너무나 거창한 말입니다. 나에게는 그렇게까지 원대한 포부는 없습니다.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은 인간의 건강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건강이지요." (284-285)
* 파늘루는 보건대에 들어온 이후로 병원과 페스트가 끌끊는 장소를 떠나본 적이 없었다. 그는 보건대를 틈에서 마땅히 자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자리, 즉 최전선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한 어린애가 죽어가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날로부터 그는 변한 것 같았다. (287)
* 신부는 바람이 심하게 부는 어느 날 그의 두 번째 설교를 했다. 그는 페스트 때문에 생기는 상황을 논리적으로 납득하려고 해서는 안되고, 거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페스트 시대의 종교는 여느 때의 종교와 같은 것일 수 없으며, 비록 하느님은 행복의 시대에는 사람들의 영혼이 안식하고 향락하기를 허용하고 심지어는 바라기까지 하시겠지만, 극도의 불행 속에서는 그 영혼이 과격한 것이 되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신의 성스러운 의지에 자신을 내맡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닥쳐온 받아들일수 없는 것의 핵심을 향해서 바로 우리의 선택을 하기 위해 뛰어들어야만 한다. 어린애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들에게 쓴 빵과 같다. 그러나 그 빵없이는 우리들의 영혼은 정신적인 굶주림으로 죽고 말 것이다. 파늘루는 결론을 짓겠다는 어투로 말했다. "신의 사랑은 몹시 힘든 사랑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전적으로 포기하여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만이 어린애의 고통과 죽음을 지워줄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 사랑만이 그것을 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저 바라는 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 교훈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보기에는 잔인하지만 신이 보기에는 결정적인 믿음인데, 우리는 거기까지 가야합니다... "(288-297)
* (파늘루 신부) 성직자에겐 친구가 없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신에게 맡겼으니까요. (303)
* 파늘루 신부는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십자가를 달라고 해서 손에 들더니 그개를 돌려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병원에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자기 몸에 가해지는 치료에 대해서 마치 물건처럼 자기를 내맡기도 있었지만 십자가는 끝내 놓지 않았다. 그래도 신부의 증세는 여전해 애매했다. 열이 높아졌다. 기침 소리는 점점 더 쇠었고, 그 때문에 온종일 환자는 극도의 고통을 겪었다. 신부는 마침내 그의 호흡을 틀어막고 있던 그 솜방망이를 토해 냈다. 그것은 새빨간 것이었다. 그런 발열 상태에서도 여전히 파늘루는 무관심한 눈빛을 유지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침대 밖으로 봄을 반쯤 늘어뜨리고 죽어 있는 그의 눈에서는 아무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카드에는 이렇게 적혔다. '병명 미상.' (304)
*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 그들에게 가장 나쁜 것은 그들이 잊힌 사람들이라는 사실과 그들 역시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아는 사람들도 다른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 생각을 잊고 있는바, 그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역시 그들을 거기서 끌어내기 위한 운동이나 계획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생각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어떤 사람을 정말로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어느 순간에도 결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살림 걱정도 안하고, 날아다니는 파리도 아 보이고, 밥도 안 먹고, 가려움도 안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리라든다 가려움이라든가 하는 것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래서 인생은 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312)
* (타루 자신에 대해서) 나는 이 도시와 전염병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페스트로 고생한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리유)처럼 가난하지는 않았어요. 우리 아버지는 차장검사로 계셨는데 그만하면 좋은 자리지요... 내가 일곱 살 때, 아버니는 나더로 자신의 논고를 들으로 오라고 하셨어요. 그날 내가 간직하게 된 유일한 이미지, 그것은 죄인의 이미지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아버지가 사회의 이름으로 그 남자의 죽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심지어는 그 남자의 목을 자르라고 요구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나는 소위 정치 운동을 하게 도었어요. 나는 결코 페스트 환자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뿐이죠.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은 사형선고라는 기반 위에 서 있으니, 그것과 투쟁함으로써 살인 행위와 싸우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간접적으로 인간 수천 명의 죽음에 동의했다는 것, 필연적으로 그러한 죽음에 이르도록 만든 행위나 원칙들을 선이라고 인정함으로써 나 자신이 그러한 죽음을 야기하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여전히 부끄러웠고 우리들 모두가 페스트 속에 잇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좋은 이유에서건 나쁜 이유에서건 사람을 죽게 만들거나 또는 죽게 하는 것을 정당호하는 모든 걸 거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칫 방심하가다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 주고 맙니다. 정직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해이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리유,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ㅇ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더욱더 피곤한 일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피곤해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면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니까요. (319-329)
* (타루) 내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내가 아는 단 하나의 구체적인 문제는 사람은 신없이 성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그저 인간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332)
* 그렇다.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페스트는 누구든지 너무 오랫동안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 당국는 날씨가 추워지면 병세가 수그러들 것으로 예상했지만, 오히려 페스트는 며칠 동안 계속된 겨울 첫추위에도 물러갈 줄 모른 채 기승을 떨었다. 더 기다려야만 했다. ㄱ러나 사람이란 기다림에 지치면 아예 기다리지 않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도시 전체는 미래의 희망없이 살고 있었다. (336)
* 아무도 감히 아이들에게 인류의 고통만큼이나 오래되었으면서도 젊은 날의 희망만큼 신선한 선물을 가득 실은 그 옛날의 신이 찾아오시는 이야기를 해 주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제 극도로 늙고 극도로 음울해진 희망, 심지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냥 가만히 죽어 가지도 목하게 하는 희망, 삶에 대한 단순한 아집네 불과한 그런 희망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339)
* 리유의 마음을 괴롭ㅎ는 것은 모든 인간이 다 같이 나누고 있는 고통 앞에서 문득 치솟는 견딜 수 없는 분노였다. (340)
* 그 늙은 해수병 환자은 몹시 흥분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리유와 타루를 맞이했다. "됐어요."하고 그는 말했다. "그놈들이 다시 나와요." "누가요?" "쥐 말이예요, 쥐!" 지난 4월 이후로 죽은 쥐는 단 한 마리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 다시 시작된다는 건가요?" 하고 타루는 리유에게 물었다. 노인을 손을 비비고 있었다. "놈들이 뛰어다니는 것을 꼭 봐야 한다니까요! 정말 기분 만점이죠." 리유는 매주 초에 실시되는 총괄적 통게의 발표를 기다렸다. 통계는 병세의 후퇴를 표시하고 있었다. (345)
* 며칠 동안을 두고 내내 싸늘하면서도 활짝 갠 채 요지부동인 찬란한 하늘이 계속적으로 쏟아붓는 광선으로 온 도시가 가득했다. (350)
* 타루에 따르건데 부인(리유의 어머니)은 언제나 생각하지 않고서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며, 그처럼 고요하게 어둠 속에 묻혀있으면서도 그 어떤 광선과도 심지어는 그것이 페스트의 광선이었을 경우에라도 어깨를 펴고 떳떳이 겨루어 나갈 수 있다는 사실 같은 것을 특히 강조하고 있었다. (360)
* 타루는 페스트가 그 도시를 변화시킬 수도 있고 안 시킬 수도 있으며 시민들의 가장 강한 욕망은 현재도 앞으로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364)
* 고마워요. 나(타루)는 죽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싸워 보겠어요. 그러나 지는 판이면 깨끗하게 최후를 마치고 싶어요. 타루의 단단한 두 어깨와 넓은 가슴은 그의 최선의 무기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아까 리유가 바늘 끝으로 뽑아냈던 그 피. 그 핏속의 영혼보다도 더 내밀한 그 무엇. 그 어떤 과학의 힘으로도 밝힐 수 없는 그 무엇이야말로 최선의 무기였다. 그리고 그로서는 자기 친구가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타루는 요지부동인 채 투쟁하고 있었다. 밤새도록 단 한 번도 고통의 엄습에 몸부림으로 대응하지 않고 다만 그 육중한 몸과 철저한 침묵으로 싸우고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는 그런 방식으로 이제는 단 한 순간도 방심할 여유가 없음을 고백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에게 그렇게도 친근했던 인간의 모습이 지금은 창끝에 찔리고 초인간적인 악으로 불태워지고 하늘의 증오에 찬 온갖 바람에 주리 틀리면서 바로 그의 눈 앞에서 페스트의 검은 물결 속으로 빠져들어 갔지만, 그로서는 이 난파를 막는데 속수무책이었다. 리유는 타루가 벽 쪽으로 돌아누우며 마치 몸 한구석에서 가장 근원적인 어떤 줄 하나가 툭 끊어지니가 한 것처럼 힘없는신음 소리를 내려 숨을 거두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369-376)
* (리유) 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님을 적어도 사랑이라는 것이 자신의 표현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이긴 것은 무엇이었던가? 단피 페스트를 겪었고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가진다는 것, 우정을 알게 되었으며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가진다는 것, 애정을 알게 도었으며 언젠가는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갖게 되리라는 것. 그것만이 오로지 그가 얻은 것이었다. 인간이 페스트나 인생의 노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에 관한 인식과 추억뿐이다. (인간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추억에 남는 것만을 지니고 살아갈 뿐, 희망하는 것은 다 잃어야 되니, 그 얼마나 괴로운 일이랴. (378)
* 희망없이 마음의 평화는 있을 수 없는 법이다. (378)
* 그 다음 날 아침, 자기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의사 리유가 담담한 심정으로 받아들였던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였으리라. 그는 자기 진료실에 있었다. 어머니가 뛰다시피 들어와 그에게 전보 한장을 건네주었다. "베르나르야!"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의사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무슨 전보냐?" 하고 어머니가 물었다. "그거였어요." 의사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일주일 전이었군요." 리유의 어머니는 창으로고개를 돌렸다. 의사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어머니에게 울지 말라고 하고,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몹시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 그는 다만 자신의 고통이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여러 달 전 부터, 그리고 이틀 전부터 계속되어 왔던 똑같은 아픔이었다. (380)
* 귀양살이의 몇 달 동안에는 될 수 있으면 시간이 어서 흘러가라고 앞으로 떠밀어 보고 싶었고 시간이 빨리 가라고 고집스럽게 재촉하고 또 재촉하고만 싶었는데, 벌써부터 우리가 사는 도시가 눈에 보이고 기차가 멈추기 위해 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반대로 시간이 속도를 늦추고 그대로 움직이지 않은 채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382)
* 같은 기차를 타고 왔지만 아무도 마중 나오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서야 그 오랜 동안의 무소식이 그들 마음속에 빚어 놓았던 두려움을 현실로 확인해야만 하는 그런 사람들을 잊어버린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 잊힌 사람들, 이제 동반자라고는 아주 생생한 고통밖에 없게 된 사람들, 그 순간 사라져 간 사람의 추억밖에는 매달릴 곳이 없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정이 전혀 달라진 이별으 슬픔은 절정에 달했다. 이름도 없는 구덩이게 허망하게 묻혀 버렸거나 잿더니 속에서 녹아 없어진 사람과 더불어 모든 기쁨을 잃어버린 어머니들, 배우자들, 애인들에게 페스트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384)
* 이제 페스트는 공포와 더불어 끝났으며, 그처럼 부둥켜 안은 팔들은 사실상 페스트가 귀양살이와 이별의 동의어였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페스트가 시 문을 폐쇄한 그 순간부터 오직 이별의 상태속에서 살아왔으며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인간적인 체온으로부터 차단된 채 지내왔던 것이다. 그렇다 모든 사람이 육체적ㅇ로나 정신적으로나 하나같이 괴로운 휴가, 도리없는 귀양살이, 결코 채울 길 없는 갈증으로 다 함게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 그들 모두에게 있어 진정한 조국은 그 질식해 있는 시가의 담 저 너머에 있었다. 그 조국은 언덕 위의 그 향기로운 덤불 속에, 바다 속에, 자유로운 고장들과 따뜻한 사랑의 무게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그 조국을 향해서 그 행복을 향해서 돌아가고 싶었으며, 그 밖의 모든 것들에 대해선느 등을 돌리고 싶었던 것이다. (388-389)
* 그들은 인간이 언제나 욕구를 느끼며 가끔씩은 손에 넣을 수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대로 인간을 초월해 자기로서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지향하고 있던 사람들은 결국엔 어떤 대답도 얻지 못했다. (390)
* 이제 베르나르 리유는 자기가 이 연대기의 서술자라는 것을 고백해야 할 때가 되었다. 페스트가 설치던 동안 내내, 그는 직책상 우리 시민의 대분분을 만나 봤고, 따라서 그들이 느낀 내용을 수집할 수 잇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되도록 신중한 태도로 전하고자 했다. 페스트 환자 수천 명의 목소리에다 자기 자신의 고백도 직접 섞여 넣오 보고 싶은 유혹을 느꼈을 때에도 그는 자기의 괴로움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다른 사람들의 괴로움이 아닌 것이 없었으며, 혼자서 고독하게 슬픔을 겪어야 하는 일이 너무나 잦은 세계 속에서 그러한 사정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에서 참었던 것이다. (392)
* 시민들 중 적어도 한 사람만은 의사 리유로서도 두둔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는 언젠가 타루가 리유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죄악은 어린아이들 그리고 인간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옳다고 긍정했다는 점입니다. 그 외의 것은 나도 이해가 가요. 그러나그 외의 것은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394)
* 총성이 아득하게 두 번 건물 안에서 울렸다. 이윽고 무슨 소란한 소리가 나더니 집 안에서부터 셔츠 바람의 작달만한 남자(코타르)가 연방 소리소리 지르면서 끌려 나왔다기 보다는 안겨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397)
*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해 두기 위하여 지금 여기서 끝맺으려 하는 이야기를 글로 쓸 결심을 했다. (401)
*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그런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기쁨에 들떠있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페스트 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다 낡은 서류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02)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