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 것과 새 것기도.영성/다네이 글방 2020. 2. 27. 21:35
2월 27일, 목요일
어렸을 때 누나들이 썼던 책을 물려받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위로 누나가 네 명이어서 옷은 넘겨받지 않았지만 교과서를 물려받았던 것입니다. 헌 책이 싫어 짜증내고 우는 저를 위해 부모님께서 새 책을 사 주시기도 했습니다. 새 책을 받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헌 달력으로 책표지를 감싸 보호하는 일이었습니다. 헌 달력 아래 새 것 그대로 있는 책 표지를 살짝 보곤 했습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책이 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수도생활을 시작하면서 헌옷을 받았습니다. 30년도 더 되는 과거의 일입니다. 수도원에 먼저 들어와 생활을 하다가 그만 둔 선배의 수도복이었습니다. 그 옷의 주인처럼 도중에 그만둘 것만 같아 찜찜했고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체구가 비슷하다는 것 때문에 물려받았지만 제 몸에 잘 맞지 않았습니다.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옷과 하나로 되었습니다.
그 수도복을 지금도 입고 있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수선을 했습니다. 몇 번을 수선했는지 모릅니다. 2년 전인가 너덜너덜해 진 수도복을 가지고 의상실에 갔습니다. 수선을 부탁했는데, 튼튼한 바탕이 별로 없어 누빈다하더라도 바로 헤질 것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살짝 슬펐습니다. 입을 때마다 조심하지 않으면 누볐던 곳이 헤져 구명이 더 커지곤 합니다만, 지금까지의 인연으로 차마 버릴 수가 없습니다.
지난 것이고 오래된 것이라 하여 모두 좋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없다면 현재의 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서 있을 수 있는 토대가 없어 어둠의 심연으로 떨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것이 주는 상큼함과 설렘이 있지만, 새로운 것이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그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부대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것이 나를 어디로 이끌어갈지 모르는 두려움도 견뎌내야 합니다.
우리 속에는 과거가 들어와 있고 우리 안으로 새로운 미래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떠났지만 미래를 향해 나가는 존재입니다. 낡고 오래된 것을 버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높고 깊고 넓은 안목과 너그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떨어내고 받아들여야 할지 살펴야 합니다. 이것을 성찰省察이라고 합니다. ‘성省’의 한자를 풀이하면 ‘소少’년의 눈으로 ‘보는(目)’ 것입니다. 자기 주변을 새로운 눈으로 보는 보고, 어린아이의 눈으로 과거를 보면서 포기하고 떨어내며 두려움 없이 미래를 향해 나간다는 말입니다.
책읽기는 새로운 정보와 지식과 안목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글쓰기는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낡고 오래된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새 것으로 드러날 수 있게 자신을 열어놓는 일입니다. 지난 한 해 책읽기와 글쓰기를 통해 여러분의 삶이 조금 이라도 풍요로워졌다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헌 것과 새 것이 교차되고 조화를 이루는 책읽기와 글쓰기를 지속하면서 풍성한 2020년으로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다네이 글방』 5권 권두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