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15일, 화요일
편한 모텔에서 잦지만 어제밤 피곤한 상태에서 마신 맥주와 몸에서 나는 열 때문에 잠을 깊게 잘 수 없었다. 아침식사도 별로 였다. 빵과 야채와 커피 혹은 아주 밋밋한 누룽지만 먹었던 사람에게 너무 강한 음식이었다. 그렇지만 반나절을 견딜 수 있는 열량은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먹어두었다. 해파랑길이라고 하여 항상 바닷가만 것든 것은 아니다. 바다와 전혀 관계없는 산길을 걸어야 하고, 마을 골목길을 걸어야 한다. 주변 구경이 목적이 아닐 말 그대로 걷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말없이 걷기만 하면 되었다. 침묵의 불편해서가 아니라 침묵하면서 걷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한두마디 하지만 그것 마저도 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이었다.
어제 저녁 충분히 자지못했기 때문인지, 걷기 이틀날이어서 그런지 몸이 무거웠다. 작년에 비해 나이가 들어서일 가능성이 많지만 일부러 그런 방향에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해파랑길을 안내하는 표지에 대해 백프로 만족한 건 아니지만 길을 찾아가는데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남쪽 방향과 7번국도에 대한 나름의 생각에 따라 길을 찾아가면 되었다. 이렇게 맘 놓고 가고 있는데 길이 막혀버렸다. 그때서야 해파랑길의 안내표지가 언제부터 나타나지 않았는가 의식하게 되었고, 스마트폰을 뒤적거렸다. 우리들의 선입견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약 40분을 그렇게 걸었기 때문에 다시 40분정도를 걸어나가야만 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고, 더 짜증난 것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허망했지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는체 하지 말고 선입견 갖지 않고 인도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야 했는데. 길을 잘못잡은 그곳까지 되돌아 와서 점심으로 물회를 먹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오전 보다 오후가 더 힘들었다. 날씨도 상당히 더웠다. 산길이고 바닷가인데도 여름처럼 더웠고 그런만큼 힘들었다. 맘같어서는 30분 정도 걷다가 쉬었으면 좋겠지만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서 보조를 맞추려고 애를 써야만 했다. 시골길과 산길을 주로 걸었기 때문에 목을 축일만한 마실것을 구할 수도 없었다. 장거리 걷기 여행하면서 개인적으로 필수품인 소금을 가져오지 않아 더 힘들게만 여겨졌다. 기억과 자기 삶의 체험에 상상력이 합쳐지면서 사람들은 생각을 깊혀나간다. 해변가에 피어있는 꽃을 보면서 아주 오래전, 젊은 시절에 방황하며 걸었던 이국의 바닷가가 생각이 났다. 그때와 유사한 바닷가의 키작은 풀과 꽃들이 과거로 인도했다. 그 사람과 지금의 나를 연결해 주는 고리를 보면서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 아닐까.
사서 생고생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정화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지금까지 생각과 몸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었던 인간적인 생각과 잘못과 욕심과 바람과 갈망과 욕망이 씻겨질 수 있다면 큰 선물을 얻은 것이고 축복을 받은 것이다. 문제는 씻겨진 그곳에 새로운 좋은 생각과 맘과 지향들이 들어서기도 하지만,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래서 ‘속되다’라고 말하는 것들이 들어서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성경 어딘가에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 않은가. 자기 방을 깨끗이 청소했는데, 바로 그곳에 자기 쫒아내었던 악마들이 자기들의 친구까지 데리고 들어와 자리잡게 되었다는. 성경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고 나자신에 관한 이야기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었다.
오전에 왔다갔다를 반복하면서 걸었던 거리까지 합산한다면 30킬로미터는 걸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적당한 잠자리가 나타났다. 얼마나 다행한 일이고 감사해야 할 일인지. 숙소를 잡는데 경비가 많이 들어가지만 날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다른 방을 쓰기로 했다. 숙소 가까운 곳에 가서 맛있게 많이 먹으면서 한 잔했다. 밤바다를 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낮에 걸으면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바닷가를 조금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