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리/책 요약
귄터 그라스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 (1999)
leibi
2025. 1. 13. 11:38
* 이야기는 태초부터 늘 있어왔습니다. 인류가 문자를 배워 점차 글을 쓰고 읽을 수 있게 되기 전부터 이미 사람들은 각자가 각자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 아무도 글을 쓸 줄 몰라서 기록을 할 수도 없었던 때에는 무엇이 이야기되었을까요? (112)
* 저는 질긴 섬유질의 문장 구조를 씹고 또 씹어 자분자분한 죽으로 만들기 위해 비할 바 없이 아름다운 고독의 순간에 혼자 중얼거리며 입으로 말해도 그럴듯한 높낮이와 멜로디를 발견하고 울림과 반향을 얻을 만한 것만을 종이 위에 써내려갔습니다. (115)
* 언어를 다루는 작가들이란 늘 높은 의자 위에서 거만을 떠는 권력자들의 수프에 기꺼이, 그리고 신중하게 침을 뱉게 되어 있습니다. (121)
* 서구 문화라는 정원에서 수확한 가장 아름다운 문학적 열매들은 특히 가톨릭의 금서 목록을 장식해왔습니다. (121)
* 작가란 과거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족속입니다. 그들은 너무 빨리 아문 상처들을 열어젖히고, 입구를 봉해놓은 지하실에서 시체를 발굴해내고, 금지된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금단의 음식을 먹어치웁니다. 그들의 가장 나쁜 잘못은 예나 지금이나 역사적 과정에서 승리한 자들과 한통속이 되기를 싫어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패배자들이 서 있던 변두리를 즐겨 서성거리면서 그들이 몹시 이야기하고 싶어했으나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의 내막 캐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패배자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는 것은 승리에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입니다 자기 주위에 패배자를 불러 모으는 사람은 패배자 편입니다. (123)
* 정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그리고 치욕적인 과거는 이제 지나간 역사의 기록으로 넘겨야 한다는 주장이 아무리 자주 제기되어도, 문학은 이해할 만은 하지만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러한 요구에 저항해왔습니다. (130)
* 흘러가는 시간과 대적하며 글을 쓰는 사람이 작가라고 하는 이 전제조건은 작가가 자신을 허공에 떠 있는 존재로 무시간성 속에 갇여 있는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 되고, 자신을 동시대인으로, 나아가서는 흘러가는 시간의 변화에 내맡겨진 존재로 인식해야 하며, 어딘가에 참견하고 누군가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간섭과 편들기의 위험성은 잘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작가에게 꼭 있어야 할 거리감이 사라져버릴 위험성입니다. 그의 언어는 손으로 쓴 원고로서가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말로서 살아가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현재 상황의 각박함이 그의 융통성을 제약하고 자유롭게 날아오르도록 훈련된 그의 상상력을 제한하지요. 그래서 그는 근시안적 안목 밖에 지닐 수 없는 위험에 처하게됩니다. 이 위험성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저를 떠나지 않고 계속 붙어 다닙니다. 하지만 위험성이 없다면 작가라는 직업은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모든 작가는 비록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태어났다고 아무리 강하게 주장해도 결국 자기 시대 안에서 태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주체로서 주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주제가 미리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131-132)
* 우리는 ‘자본주의’가 형제인 사회주의는 죽었다는 그 선언 때문에 과대망상에 빠져 아무 거리낌없이 날뛰기 시작한 모습을 경악을 금치 못하며 지켜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시장을 유일한 진리로 내세웁니다. 이윤을 극대화 하기 위해, 미친듯이 도박을 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에서처럼 자본주의에도 개혁 능력이 없다고 입증되었습니다. 자본주의 강령은 세계화입니다. 이 강령은 무오류성이라는 오만을 뽐내고 있습니다. (135)
* 지금은 문학이 오히려 대중에게 외면당하고 있고 어쨌든 젊은 작가들은 인터넷이라는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닙니까? 문화 산업을 뒤흔드는 고통의 꼴짜기가 서구 세계를 포로로 잡고 있는 형국입니다. (136)
* 미래는 모든 것에 관해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날 더이상 글을 쓸 수 없거나 출판이 되지 않는다 해도, 살아남는 수단으로서 책을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세상이 온다 해도, 옛이야기들을 새로이 꾸며 우리 귀에 입을 대고 숨결을 전하는 이야기꾼들은 이 세상에 존재할 것입니다. (138)
(<아버지의 여행 가방>, J.M.G 르 클레지오 외, 문학동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