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ibi
2024. 12. 14. 11:32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치>에서 미쉬킨 공작은 한스 홀바인 2세가 그린 “무덤 속에 모셔진 그리스도의 시신”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그림을 보면 누군가는 믿음을 잃을 수도 있겠군.” 그 그림은 죽음이 그리스도의 몸에 끼친 파괴적인 효과를 소름 끼치도록 자세히 묘사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신앙의 빛> 16항)
***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미화해서 받아들이려 합니다. 그분이 시신이 너무도 처참해, 그것을 외면하고 싶어서 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 삶과 관련이 없지 않지만, 먼 과거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 일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로 축소시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가까이서 보면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판단을 최대한 멀리하면서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어렵고 고통스런 일일지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십자가의 죽음과 우리에게 남겨진 그분의 시신에 관한 사건의 핵심을 놓쳐버리게 됩니다. 그와 똑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게 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전문을 통과해 마감재가 낡고 어둠침침한 로비에 들어서자, 손가락과 발가락이 한 개씩 잘려나간 손과 발의 사진이 벽에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눈을 피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잠시 들여다봤다. 오히려 실제보다 무섭게 기억할 수도 있으니 제대로 보려는 거였다.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그건 제대로 볼수록 고통스러운 사진이었다. 더듬더둠 그 사진의 오른편으로 눈을 돌리자, 같은 손과 발에 손가락과 발가락이 봉합된 사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또렷한 수술 자국을 경계로 피부의 색깔과 질감이 달랐다.”(<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문학동네, 2024, 32)
<작별하지 않는다>의 주인공 경하가 손가락 두 개가 잘려나간 친구 은선에게 일어났을 일을 제대로 보고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오래전에 일어났던 비극적인 일을 들추어 내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드러냄’의 고통스런 시간을 거치지 않고, 그 사건을 덮으려고 한다면 그와 똑같은 비극을 되풀이 하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서 체험한 것에 기반하여 생활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본 것이 전부는 아니고 들은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오감의 한계라고 말하기 보다는 한계 지어진 인간의 특성상 그럴 수 밖에 없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에 대해 깊고, 넓게, 길고, 높이 보기 위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 시간을 숙고라고 하거나 성찰이라고 하든, 묵상이라고 하거나 관상이라고 하든, 이 시간을 거치면서 일어났던 일을 내 삶과 나의 일부로 만들어 가야만 합니다. 물론, 일상의 모든 일을 이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자기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거나 사람들의 삶을 흔들어 놓았던 사건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동물처럼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