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영성/다네이 기도학교

기도(수련)에 대해서

leibi 2024. 8. 13. 12:25

“마음으로  기도하라.”라고 합니다. 기도와 관련된 강의 때 많이 하는 말이고, 기도하는 사람이 많이 듣는 말입니다. 하도 많이 들어서 지극히 당연한 말이고,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마음’으로 기도하려고 할 때, 정작 ‘마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몰라 혼란을 겪습니다. 도대체 ‘마음’이 무엇일까요?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기도해야 할까요?

’마음‘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는 글이 많이 있습니다.  성서적인 관점과 그리스도교의 인간론에서 말하는 글이 있고, 철학적이고 심리적이고 정신의학적인 글과 여러 종교에서 마음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글들입니다.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읽는 글인데, 읽으면서 ‘마음’이 무엇인지 더 아리송해집니다. 여기에 기도하는 사람 자신이 체험한 것을 가지고 ‘마음’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읽다 보면, 말 그대로 ‘마음'이 더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다시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마음’이 무엇일까?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기도해야 한단 말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은 인간 전체를 말합니다. 한 인간 인격의 진수이며 그 사람의 가장 심오한 내면성을 말합니다. 달리 말한다면, 기도하는 그 사람을 가장 자기답게 해주는 것을 마음이라 하고, 기도하는 사람 의식의 가장 깊은 곳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마음’은 지성과 의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감정이나 정서상태를 말하지도 않고, 감각적인 것은 더구나 아닙니다.

 

‘마음’은 한 인간의 몸과 감각을 통한 체험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며, 인간 정신과 지성과 의지의 원천이며, 삼위일체 하느님을 모셔들이는 곳입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은 한 사람의 기억을 통해 구체화됩니다. 그래서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인간의 '기억'에 대해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했던 다양한 기억 중에 어떤 기억이 제 마음입니까? 어른이 될 때까지 수없이 많은 기억을 갖고 있는데, 그중 어느 것을 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어렸을 때의 기억과 어른일 때의 기억이 한 곳에 모인 곳, 자기 삶과 관련된 모든 기억이 수렴되는 곳, 그곳이 바로 마음이라고.

 

기도 '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행위를 말하며, 이것을 기도수련이라고 합니다. 기도수련을 통해 자신의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 머물고, 그 마음 깊은 곳에 계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바라며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는 언제나 지금  이곳에 있는  '현재의 나'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현재의 나’는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현재의 나’가 과거 나'들'의 총합이며, 미래의 가능성도 '현재의 나'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현재 자신의 마음을 대할 때, 자기 신체적인 측면과 감정적인 측면, 그리고 정신적이고 지적인 측면과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정서 상태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현재의 나'가 드러나는 이런 마음의 상태에 대해 영성가들은 다양하게 부릅니다. 마음에 들러붙어 있는 ‘껍질’이라고 부르며, 마음을 둘러싸고 있는 '방 들'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기억과 의식의 층위라 부르기도 합니다. 기도수련을 할 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은 자기 마음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벗겨내고, 방을 정화시키고, 마음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도수련에는 아주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각기 다른 종교에서 기도수련을 통해 발전시킨 방법들이 있습니다. 같은 종교라 하더라도 기도를 이해하고 접근하는 방식에 따라 상이한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시대에 유난히 발전된 방법이 있고, 기도에 전념했던 각 사람이 즐겨 사용했던 방법이 있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교안에도 여러가지 기도 수련 방법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어떤 방법이든 그리스도교의 기도수련에서 반드시 포함하고 있어야 할 것은 세 가지, 몸과 마음과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의 몸을 취하시어, 우리 가운데(마음)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몸만을 강조하게 되면 '몸 치유'라는 말을 거리낌없이 사용하게 됩니다. 기도할 때 마음만을 강조하게 되면 뉴에이지 같은 유사영성으로 빠져나가게 됩니다. 말씀만을 강조하게 될 때, 기도가 말씀에 대한 신학적인 탐구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스도교가 위기에 처했다고들 합니다. 세례받은 천주교 신자의 20% 정도만 주일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미사와 전례에 참석하고 있는 신자들도 의무감에서 참석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이 삶의 활력이 되고 기쁨이 되며, 한 인간으로 참되이 사는 길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합니다. 기쁨이 아니라 의무감과 메마름에서 하는 신앙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47년 전, 김수환 추기경께서 기도의 체험(안토니 블룸) 서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과연 기도하는 교회인가? 한국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인가? ‘교회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도라고 생각하는 이가 한국 교회 안에 얼마나 될까? ... 한국 교회가 생기를 잃고, 침체되어 가는 것을 우리는 나날이 느낄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 어떻게 기도할 줄도 모르거니와 기도가 얼마나 필요 불가결하고 중요한지 조차도 별로 느끼지 못하는 데에 있지 않는가 생각한다.” 오래전 추기경님께서 통찰력이 있어 이런 글을 쓰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몇 백 년 전에도 기도에 관해 이와 같은 말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기도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신앙생활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과 함께,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올바르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자기 신앙을 회복하고 살아있게 하기 위해, 꾸준히 기도(수련)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도록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부름으로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는 사제와 수도자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 기도(수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