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ibi
2024. 7. 20. 08:40
나는 정(덕현)씨와 같이 본가에 와서 부모님을 뵈었다. 당시 왜병들이 죽천장에 진을 치고 동학당을 수색하는 중이라 부모님은 매우 불안해 하셨다. 부모님은 나에게 다시 멀리 가서 화를 피할 것을 권유하셨다.
다음날 정씨가 청계동 안진사에게 가 보자고 하니, 나는 주저하였다. 안씨가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패군의 장수닌 내가 포로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두고두고 후회될 것이 염려되었다. ... 나는 정씨와 같이 그날 천봉산을 넘어 청계동 입구에 도착하였다. 청계동은 사면이 험준하고도 수려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민가는 40-50채로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동네 어귀에는 작은 산이 하나 있었는데, 산꼭대기에는 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
이리하여 그날 바로 청계동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때 내 나이 스무 살 을미년(1895년) 2월이었다. 안진사는 “날마다 사랑에 와서 내가 없을 때라도 내 동생들과 놀고 친구들과도 담화하든지 서적을 보든지 마음대로 안심하여 지내라”고 친절히 부탁하였다. 안진사 여섯 형제는 큰형이 태진, 다음이 태현, 안진사 태훈은 세번째이고, 넷째는 태건, 다섯째는 태민, 여섯째가 태순이다. 여섯 형제 모두 학식이 풍부하고 인격이 높았는데, 그중에서도 안진사는 탁월하였다.
진사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맏아들은 중근으로 당년 열여섯에 상투를 틀었고, 자색 명주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서 돔방총을 메고 노인당과 신상동으로 날마다 사냥을 다녔다. 중근은 영기가 넘치고 여러 군인들 중에도 사격술이 제일로, 나는 새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으로 맞추는 재주가 있었다. 안진사는 자기의 아들과 조카들을 위하여 서재를 만들었다.
당시 빨간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느러뜨린 8,9세의 정근.공근에게는 “글을 읽어라” “써라” 독려하면서도, 맏아들 중근에게는 공부 않는다고 질책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 안중근이 어려서부터 사냥을 좋아하여 글공부를 뒷전으로 미루자, 부모와 선생은 꾸중하였다. 그러나 안중근은 초패왕처럼 장부로써 살기로 결심하고 글공부에는 연연하지 않았다.그후 아버지는 안중군에게 글공부를 재촉하지 않았다고 한다.) (<백범일지>, 김구, 돌베게, 1999, 55-58)
* 백범 김구가 본, 안중근의 아버지 안진사(태훈)와 그의 맏아들 중근에 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