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리/책 요약

고해 사제의 밤

leibi 2024. 4. 23. 09:22

《고해 사제의 밤》, 토마시 할리크/최문희, 분도출판사, 2021)

 

* 고해사제들이 심리학자와 겹치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다. 고해사제들은 우리가 성사라 부르는 신비, 그 거룩한 신비 깊은 곳에서 나오는 의미와 치유력을 지닌 말들을 해 줄 수 있다. (13)
* 사람들은 때때로 자기 생각과 경험과 행동으로 이루어진 종교적 체계 전체가 크고 작은 위기에 처했을 때 고해사제를 찾는다. 적어도 이 책을 통해 고백하는 고해 사제의 경우에는 그랬다. 그들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는 느낌을 받지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자신도 인정하는 의식적인 도덕적 잘못 또는 죄의 결과인지, 아니면 자기 삶이나 인간관계의 어떤 변화와 관련이 있는지, 그것도 아니면 오랜 시간에 걸쳐 자기도 모르게 신앙이 약해지고 희미해진 결과를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인지 분간하지 못할 때가 많다. 진지한 노력과 오랜 영적 추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지금까지 찾아간 곳에서는 충분히 납득할 만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지금까지 영적 고향으로 여겼던 것이 좁아터진 거짓 껍데기로 보이기 시작해서 공허함을 느끼기도 한다. (14)
* 우리의 위기를 감추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내 깊은 확신이다. 위기를 회피하거나 비껴가서는 안된다. 위기가 우리를 겁주게 해서도 안된다. 위기를 헤치가 나갈 때만 우리는 더 성숙하고 지혜로운 상태로 다시 형성될 수 있다. (16)
* (주님께서 패배하셨는데) 왜 우리 자신의 패배를 두려워하는가? (17)
* 하느님의 시험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신앙은 살아 낸 신앙이라고 신약성경은 곳곳에서 말하고 있다. 삶으로 체현되지 않는 단순한 확신은 그분 보시기에는 그저 위선 죽은 신앙일 뿐이다. (24)
* 개인이 참으로 세상을 신뢰하며 세상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신앙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자기 나름의 신이 되거나 불완전한 가치를 신격화하는 생활방식은 우상숭배이자 신앙의 태도에 반대된다. 신심이란 손대지 않은 삶의 신비에 대한 개방성이라고 생각한다. (25)
* 우리 신앙이 무언가의 속성을 지닌 많은 것들, 곧 우리 개인적 개념과 투영과 바람,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의 기대, 우리가 만든 정의와 이론, 우리 이야기와 신화의 세계, 우리의 가벼운 믿음 등에 짓눌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직 그 모든 것에서 우리 양을 한껏 채우지 못해 더 많이 바랄지도 모른다. 이 복잡한 삶에서 우리에게 더 많은 신앙, 더 많은 확신과 약속을 주시라고 청하는지도 모른다. (35)
* 예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터무니 없는 정신 나간 짓이고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아마 우리가 예수의 가르침의 급진성을 누그러뜨려 우리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해석으로 성급하게 희석하고 다듬었기 때문이다. (42)
*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요한 18,36) 하느님의 자리는 불가능한 것들의 나라, 말도 안 되는 것들의 나라안에,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논리적인 역설의 논리가 적용되는 어딘가에 있다. (43)
* 사심없음과 비폭력 같은 터무니없고 비논리적인 행동을 의미 있게 만드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다. 그분은 그런 행동이 의미를 지니게는 하지만 그렇다고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하느님은 가능한 것, 통상적이고 예견되는 것의 지평을 초월한다. (46)
* 세상의 잔인성에 맞서는 저항 자체, 사람들이 그런 세상을 부조리하게 여긴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이 의미를 열망한다는 증거다. 인간다움을 견지하는 한, 인간은 악과 절망을 고분고분 받아들일 수 없다. 인간 마음 안에는 근본적으로 의미를 향해 이끌리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마음 안에는 저항과 동경과 희망의 의미를 향해 열린 무언가가 있다. (49)
* 얄팍한 종교적 열정에 치우치는 것을 늘 경계하고 바로잡기 위해서 약간의 회의론과 반어법과 비판적 이성을 갖추는 것은 정신 건강과 영적 건강의 필수 조건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함성과 외침으로 하느님의 참된 목소리를 덮어 버리지 않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70)
* 단순화, 진부화, 평범화에 동의하고 모든 것이 명쾌하다는 느낌에 빠지는 순간,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된다. 껍데기뿐인 얄팍한 종교는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지거나 무미건조한 사막으로 빠질 뿐, 깊어지지 못한다. (76)
* 하느님은 우리가 가닿을 수 없는 빛 속에 머무르시며, 기도는 신비를 위한 침묵이고, 신앙은 그 신비를 존중하고 신비에 적응하는 것이며, '알았다'라고 외치는 소리는 길에서 벗어났다는 증거일 수 있다고 사람들에게 말해야 한다. (77)
* 예수님의 인성은 그분께서 이 세상과 세상의 역사에 깊이 뿌리박고 계시며,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심을 뜻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자라 나온, 그분 인성의 신비적 확장 같은 것이다. 교회는 세상과 역사의 일부로 여겨질 수도 있으나, 세상에서는 미완성이고 종말론적 미래에 열려있다. (84)
* 너무나 크고 너무나 시끌벅적하고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의 확신이 정말로 위대한 한 것, 침묵을 통해 말하고 감우어짐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며 작고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들 안에 자신의 위대함을 감추고 있는 신비를 가릴 위험이 있다. (85)
* 과학은 하느님의 존재를 절대 입증할 수 없다. 과학적으로 입증된 신은 우리가 믿을 만한 가치가 없다. (89)
* 과학과 종교, 더 정확하게 과학자들과 신앙인들, 특히 신학자들은 절대 자기 학문 안에만 갇혀 머룰러 있지 않으며 언제나 철학의 영역 안으로 뛰어든다. 과학자들이 현미경에서 신학자들이 성경에서 고개를 들어 세상에 뭔가를 말하고 싶다면 철학의 언어와 기법을 빌려 올 수밖에 없다. (92)
* 철학 영역에서 경거망동하지 않는 과학자들만 참으로 과학과 종교의 대화에서 유익한 대화 상대가 될 수 있다. (94)
* 신앙의 전이해에 사유가 빠져 있을 때, 근본주의적 확신이라는 위험한 바이러스가 활개를 친다. (96)
* 신앙과 신학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 곧 우리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신학이 창조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우리는 모두 우리가 하느님이라 부르는 신비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존중과 겸손, 책임이라는 구체적 자세를 갖추도록 도덕적 의무를 지우이게 매우 중요하다. (98)
* 신앙은 개념들과 이러저런 것들에 대한 견해가 자리 잡고 있는 우리 정신의 표층에서 우리가 키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방향, 이 삶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 태도로 이루어진다. (101)
* 나의 중심성이 우세할 때, 나는 나 자신의 하느님이 된다. 살아있는 신앙은 자기 신격화라는 병에 항구한 예방책과 치료법을 제공한다. (110)
* '모든 종교가 사실 다 똑같고, 모두 똑같이 타당하다'라는 말을 나는 단호히 거부한다. 대체 누가 그런 판단을 할 수 있을 만큼 모든 종교에 대해 완벽히 알 수 있는가. 그렇게 탁월한 객관성을 유지하며 모든 종교를 비교할 수 있는가? 나는 종교를 공부하면 할수록 종교들 사이의 차이, 그 다양성과 다원성과 비교 불가능성을 깨닫는다. (137)
*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다른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현존한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인식하거나 말하는 모든 것은 의인화된 것, 불충분하고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다. (149)
* 나는 종교란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만 관련된 것이 아님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종교 영역은 윤리적, 심미적, 성적 영역처럼 인간 삶의 근본적이고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다. 사람들의 삶에서 종교 영역은 종종 소홀히 다루어지거나 편견과 착시의 잡초더미에 숨통이 막히는 경우가 잦다. (154)
* 그리스도교가 박해로 혜택을 입었다는 반복되는 주장은 일부만 맞는 말이다. 교회가 너무 오랫동안 공공생활 밖으로 내몰려 있으면 그 사회 전반에 부정적인 결과가 생기기 마련이다. (156)
* 이성이란 인간이 성공과 개인의 성숙, 이해 능력과 세상을 바꿀 능력을 얻기 위한 강력한 도구를 가리킨다. (169)
* 태고적부터 악과 고통의 매혹적인 신비는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왔지만 사람들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기도 했다. 자연 재해를 하느님 분노의 표현을 치부하면서 종교적 위협을 통해 종교자산 수확의 목적으로 악용하는 것은 비열한 일이다. (176)
*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죽어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179)
* 기도한다는 것은 내가 보일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과 존경의 끈으로 나와 엮여 있는 많은 이의 눈길은 하느님의 뜻은 찾는 힘든 임무를 해 나갈 때 나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180)
* 우리 죄에 대한 그분의 침묵은 꼭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표징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으며, 그보다는 인내와 기꺼이 용서하려는 뜻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183)
* 화해의 성사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해방하는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 희망은 천박한 낙관주의와 다르듯, 기쁨은 저속한 재미와 다른다. (185)  
* 대학은 전인격을 가꾸는 환경, 학자가 신사가 되기 위한 곳이다. 신사란 어떤 환경에서도 예컨대 그에게 꼭 우호적이지 않을 수도 있는 환경에서도 또한 남들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든 홀로 있든, 자신이 성장한 배경이자 자신이 책임도 지니는 그 문화의 기본 가치에 충실한 사람이다. (187)
* 지나치게 이성적이며 성공과 힘에 집착해 온 이 사회(미국)는 오랫동안 광기와 폭력의 악마에 흘려 있었고, 그 악마(빈 라덴)가 여기저기서 살인마 양성 학교 학생이라는 실체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198)
* 설교란 성경 본문과 우리의 세상 경험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한 것이다. 설교는 성경과 우리 삶이 서로를 해석하는 해석학적 연결 고리를 북돋우기 위한 것이다. (204)
* 신앙은 하느님의 말씀으로도 살아가고 그분의 침묵으로도 살아간다. (238)
*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나서 믿음과 희망의 잠재력이 다 소진되었을 때 그들의 의심을 호교론적 논쟁으로 공격하기보다는 다시 믿을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그럼에도라고, 다시 한 번이라고 말하는 신앙의 걸음을 내디딜 수 있도록 지지와 격려를 보내는 것은 신앙인의 몫이다. (243)
* '어찌하여 사라는 웃느냐?' 주님께는 '너무 어려워 못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사라는 몰랐을까? 사라는 두려운 나머지 거짓말도 한다. 사라의 웃음은 신뢰하기 두려운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246)
* 상황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한다면, 고독과 집중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위기의 깊이를 인정하고 체험하지 못한다면 변화하고 새롭게 시작할 기회도 놓칠 수 있다. (250)
* 인간으로 진화하기는 했지만 인간답게 되지는 못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다시 정글 속 길 잃은 원시인들처럼 느끼기 시작한다. (254)
* 우리는 포스트 모던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큰 이야기들의 종말을 특징으로 하는 시기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이 시대는 또한 우리의 문화적 기억 속에 저장된 많은 이야기가 새로운 맥락에서 새로운 해석으로 돌아오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신앙이란 본질적으로 재해석, 삶의 상황을 비범하게 읽어내는 것이 아닌가? (257)
* 참된 영적 돌아옴은 퇴행이나 뒷걸음질이 아니라 더 깊이 내딛는 걸음이 되어야 한다. 여정의 가치와 의미는 그들이 돌아오는 길에 여러 방식으로 드러난다. 오래 집을 떠나 있다 돌아오면서 자기 집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여행하는 동안 그들을 풍요롭게 했던 것들을 돌아온 후에 비로소 참된 자산이 된다. 우리에게 일어났던 많은 것들은 집의 안정됨과 차분함 속에서 비로소 체험으로 무르익을 수 있다.  (259)
*  우리는 매일 밤, 깨어 있는 사람들의 공유된 세계에서 잠든 사람의 사적 세계로 돌아간다. 어린이들은 논리나 진리의 개념에 따라 추론하지 않고 그들의 세계는 아주 풍요로워서 아무 문제없이 역설을 표현할 수 있다. (262)
* 세계는 우리에게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크다. 현실은 우리 이성과 우리의 일상적이고 틀에 박힌 사고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무한한 변화와 가능성을 감추고 있다. (263)
* 하느님은 모든 인간 행위의 역량 전체를 무한히 초월하는 어떤 것이며 하느님을 온전히 인간적인 것으로 축소하려는 시도는 하느님을 우상으로 대체한다는 뜻이다. (268)
* 우리 그리스도인은 관상을 다시 배워야 한다. 관상이란 하느님께서 당신의 독특한 사건들과 우리의 삶을 통해 말씀하실 수 있게 하는 내적 침묵의 기술이다. (270)
* 사람들의 영적 여정을 동행하는 고해 사제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은 우리 삶의 사건들에서 하느님의 암호를 식별하고 알아보면 우리 삶을 통해 던지시는 그분의 도전에 응답할 수 있도록 침묵하고 경청하는 시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