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ibi
2024. 2. 24. 10:28
걱정하지 마, 라고 주영이 말한다.
그래 걱정하지 않을 게, 라고 대답한다.
걱정하지 않으면 무엇이 대신 남을까.
명랑성.
(《희망의 피아노》, 김진영, 한겨레출판, 2018, 258)
☞ 결핍과 죄악과 곤궁은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기 어렵다. 그들의 모습이 아주 또렷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파수꾼이 그들이 들어올 수 없게 막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심(걱정)은 우리 마음을 지키고 있는 문의 열쇠구멍을 통해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우리 귀에 들리지 않는 근심(걱정)의 소리는 마음속에 들어와 우레 같은 소리로 되어 그때부터 무서운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근심(걱정)에 사로잡히면 온 세상이 쓸모없데 된다. 영원한 어둠 속에 갇혀 해가 뜨는지 달이 지는지도 모른다. 갖고 있는 온갖 보화를 자기 것으로 가질 수 없다. 모든 것이 풍족한 때에도 항상 배고프고 굶주려있다. 기쁨과 즐거움을 뒤로 미루며 향유할 수 없다. 자신과 타인이 성가신 짐으로 되고 숨을 쉬고 있지만 질식할 지경으로 된다. 절망하지 않으나 생기가 없고, 어떤 일과 사람에 몰두할 수가 없다. 한평생 앞을 보지 못하게 하여, 우리를 장님으로 만들어 버린다. (괴테 《파우스트》 11382행-11485행 참조)
세상에서 살면서 근심걱정할 것들이 왜 없겠는가. 그럼에도 근심걱정 하지 말라는 것은 무슨 이유때문인가?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마음인가. 세상에서 눈을 돌리고 살기 때문인가. 근심걱정이 근거없는 것에 대한 믿음임을 깨달았기 때문인가. 그것이 어떤 이유이든, 어제의 근심걱정에 사로잡혀 있어도 안 될 것이고, 내일 일어날 일을 미리 가져와 그 일에 대해 걱정할 필요도 없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삶에 대한 한없는 긍정(명랑성), 그로부터 나올 수 있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