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ibi 2024. 2. 9. 18:30

유혹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야기가 창세기 서두에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동산을 만드시고 그 한가운데 생명의 나무를 심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에게 동산에서 나는 온갖 열매는 마음대로 먹어도 되지만 생명나무 열매만은 손을 대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다가가 생명의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고 유혹합니다. 여자가 뱀의 꾐에 넘어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살고 있었던 남자에게 줍니다. 그 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던 남자와 여자의 탓을 묻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여자 때문에 그리했다고 말하고, 여자는 뱀 때문에 그리 되었다고 말합니다. 자기 탓이 아니라고 말하며 발뺌을 합니다.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 자기를 유혹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야고보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야고 1,14) 다른 사람이 자기를 유혹한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던 욕망이 있었고 이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마음에서 유혹이 시작된 것이라고.

그렇다면 내 속에 있는 이 '욕망'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무엇을 위한 욕망인가? 허락되는 욕망은 무엇이고 거부해야 하는 욕망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많은 질문에 맞딱뜨리게 됩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괴테는 《파우스트》를 집필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파우스트가 말합니다. "나는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심지어 신학까지도 온갖 노력을 기울여 철저히 공부했지만,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는 전보다 똑똑해진 것은 하나도 없는 가련한 바보."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철학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모든 지식과 지혜, 법학으로 대변되는 인간이 걸어야 할 참된 삶, 의학의 지식으로 인간 생명을 지배하고 싶어 하며, 하느님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거대한 욕망입니다. 

파우스트를 놓고 메피스토텔레스는 주님과 이런 흥정을 합니다. "허락만 해 주신다면 녀석을 슬쩍 나의 길로 끌어내리이다." "그가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네가 무슨 유혹을 하든 말리지 않겠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 그의 영혼을 그 근원으로부터 끌어내어, 어디 너의 길로 유혹하여 이끌어보려무나. 하지만 너는 언젠가, 착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알고 있어군요라고 고백하게 되리라." 이렇게 메피스토텔레스가 주님의 말 상대로 등장하여 파우스트를 여러 가지 유혹과 시련 속으로 이끕니다. 그렇지만 메피스토렐레스의 주도로 파우스트가 감당해야 했던 많은 유혹들은 이미 파우스트의 삶과 내면 여기저기에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숨어 있었던 것이 드러난 것일 뿐입니다.  

파우스트는 자기 속에 있었던 욕망의 유혹에 떨어져 괴로워하고, 욕망을 거슬러 행동하면서 자유를 맛보면서 삽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순간에 눈이 멀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의 마음속에서 밝은 빛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외적으로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죽어가는 파우스트에 대해 메피스토텔레스는 "어떤 쾌락과 행복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변화무쌍한 형상들만 줄곧 찾아 헤매더니, 최후의 하찮고 허망한 순간을 이 가련한 자는 붙잡으려 하는구나. 내게는 억세게도 항거한 놈이지만, 세월 앞에 별수 없이 백발이 되어 모래 위에 누웠구나. 시계는 멈추었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텔레스에게 항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었던 욕망과 싸우고 항거하고 포기하고 받아들이며 살았던 것입니다. 비록 그러한 삶이 허망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을 지라도,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한 줄기 빛을 찾는 것이었고, 바로 이것이 그를 구원의 길로 인도했던 힘의 원천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일 당하는 유혹과 매일 싸워야 하는 욕망은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힘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