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ibi
2023. 9. 12. 11:44
"자기를 좋아하고 인정해 주는 이와 함께 있으면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다시 피어납니다. 열여덟 살이든, 마흔네 살이든, 예순두 살이든 ···. 배우도 사랑받으면 피어나는 꽃입니다."(<생에 감사해>, 김혜자, 126)
☞ 「셜리 발렌타인」(윌리 러셀 원작, 하상길 연출, 김혜자 외, 극단 로뎀, 2001)을 회상하며 김혜자가 한 말입니다. 이 연극은 평범한 가정 주부로 살고 있는 셜리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소외된 중년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과정을 풀어냈다고 합니다.
결혼생활 20년. 자로 잰듯한 살림을 요구하는 남편, 타인처럼 멀어진 남편. 성장하면 자신과 함께 이야기를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아이들, '엄마는 신경쓰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 합니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셜리가 말합니다. "벽아, 또 너하고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이런 셜리에게 이혼한 여권 운동가로부터 편지가 옵니다. 2주일간 그리스 해변으로 여행을 떠나자고 하면서 항공권을 보냈습니다. 그리스에서 셜리에게 일어난 일을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보여줍니다.
그리스 해변에서 셜리가 혼자 말합니다. " 난 죄를 지은 거야. 하느님이 나한테 주신 인생을 충실하게 살지 못한 거라구. 더 기쁘고 만족스럽게 할 수 있는데, 나 스스로 체념한 채 한심한 꼴로 사는 거야. 그 모두를 쓸모없이 소모해 버리고 말았던 거지. 이젠 결코 그러지 않을 거야. 인생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라며, 무엇 때문에 태어났겠어? 쓸모없는 것이라며, 이 모든 느낌과 꿈, 희망은 무엇 때문에 지니고 있는 거냐구." (126)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와 가방을 버린 채, 해변을 걸으며 말합니다. "난 이제 나 자신을 진실로 좋아하게 되었어요. 난 내가 좋아요. 살아 있는 내가 정말 좋아요. 뛰어나지도 못하고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인물도 못 되지만, 그래도 난 살아 있는 걸요. 물론 상처도 있지요. 싸움에서 얻은 흉터도 있어요. 하지만 그 상처도 숨길 필요는 없겠지요. 그 상처, 그 흉터 모두가 살아있다는 증거니까요."(127)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해 절망하고 낙담하면서 했던 이야기와 자신감을 갖고 당당하게 말하고 자신의 삶을 긍정하게 된 셜리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셜리가 이렇게 바뀔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했을까?
사람은 사랑받고 사랑하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씨앗을 꽃피우고 열매 맺어가는 존재입니다. 엄마가 애기 젖을 주고 먹을 것을 주고, 따뜻하고 포근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더 많이 성장할 수 있도로 여러가지 도움을 주는 것. 이 모든 것이 사랑으로부터 나온 행위이고, 아이는 그 사랑과 더불어 자라고 성장합니다. 이것은 아이에게 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랑받지 못한 그래서 사랑할 줄 모르는 어른들은 나무가지처럼 딱딱하고 부러지기 쉽습니다. 경직된 모습이 얼굴과 온몸과 행동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이렇게 경직된 모습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했고 사랑하며, 사랑받았고 사랑받고 있는 사람만이 부드러울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부드럽게 되고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정은 사랑이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행위입니다.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받아들여지고 인정받는 존재라고 여겨질 때, 사람은 너그러워집니다. 사람의 생각이 옹졸해지고 자기의 생각에만 몰두하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죄를 짓고 나서도 그런 자기를 인정해주는 누군가를 찾고 원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이런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가 어떤 말과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한없이 '인정하고 긍정해 줄 때', 원래 자신의 선함으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받으면 피어나는 꽃'에 대해 말하면서, 김혜자는 이런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