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ibi 2023. 7. 14. 08:51

베드로는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저는 무엇이든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베드로에게 다시 두 번째로 소리가 들려왔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사도 10, 14-15)


* 돈과 명예와 지위와 권력에 대한 욕구와 욕망이 속된 것인가. 육신에게 필요한 먹고 싶고 쉬고 싶은 욕구가 속된 것인가. 육신이 찾는 즐거움과 쾌락을 속되다고 할 수 있을까. 자기의 생각과 의지에 따라 행하고 싶은 욕구와 의지를 속되다고 하는가.

이런 것에 대해 속되다고 가르치지 않았나. 이 속된 것을 나쁜 것과 동일시하면서, 나쁜 것들이기 때문에 멀리하고 못본 체 해야 하고 포기하고 그것에 대해 죽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나?

아침마다 개수대에 있는 음식 쓰레기 비닐 봉투를 본다. 온갖 음식 쓰레기로 가득 차 있다. 쓰레기 한두 개라도 더 넣기 위한 욕심으로 쑤셔 넣은 쓰레기로 비닐 봉지 주둥이까지 차있다. 터질 것만 같다.

비닐 봉투와 사람들의 피부가 오버랩된다. 사람이란  얇은 피부로 감싸여진 육이다. 육과 보이지 않지만 부정할 수 없는 정신과 마음으로 되어있는 사람. 그로부터 온갖 것이 나온다. 선하고 고상하고 거룩한 것과 온몬을 떨리게 하는 아름다운 것이 나온다. 탐욕과 분노와 욕설과 시기와 증오와 집착과 욕구와 욕망이 나온다. 사람의 정신과 마음과 육신이 이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정화되기 위해, 정화되어 하느님의 모습을 되찾으라고 말한다. 정화된다는 건,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무엇을 버릴 것인가는 자기가 자의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한다기보다, 다른 사람에 의한 가치기준과 판단에서 시작된다.  자기가 선택하고 결정한다고 해도, 이런 외부의 가르침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정화되어 하느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포기와 죽음에 대해 말한다. 이 포기와 죽음이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생물체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하느님께 가기 위한 이 포기와 죽음이 ‘작은’ 죽음이라고 말한다. 이런 작은 죽음으로부터 큰 생명에로 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은 큰 생명, 큰 자기 자체를 볼 수 없다. 다만 그런 것이 있으려니 생각하고 믿고 바라며, 그런 쪽을 향해 나갈 뿐이다.

매미. 여름의 한 가운데에 있음을 알려준다. 매미소리가 아름다운 멜로디로 듣는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비명과 절규하는 소리로 듣는다. 어떤 비명이고 절규일까? 여름과 더불어 사라져야 하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것인가. 그 포기와 죽음 너머에 있는 새로운 생명을 갈구하는  몸부림에서 나오는 소리인가. 생명으로 가득차 있는 싱싱하고 튼튼한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매미는 그나마 낫게 보인다. 말라시든 나뭇가지에 붙어 소리치는 매미는 처량해보인다.  언제가 부러져 땅에 떨어져 썩어 없어질 나뭇가지의 처량함이며, 그런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매미의 처량함이다. 비오는 날이라, 매미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수없이 보고 들었던 체험을 통해 얼마든지 연상할 수 있는 모습이다.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 가지가 잘려나간 나무둥지의 굼벵이들, 이들은 목질부분을 해체하기 위한 일꾼들이다. 목질부분이 해체되어 다시 한 줌 땅으로 되면서, 나무의 한 생애가 끝난다. 나무의 이런 변화를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무가 변해가는 자연스런 모습이다. 자연의 일부인 사람은 왜 이렇게 되지 못할까. 정신이 있고 의식이 있고 마음이라는 것이 있어, 과거를 회상할 수 있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인가.

진드기. 몇 년 전 수도원에 아미라는 개를 키웠다. 그곳을 찾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으며 자랐다. 어느 날 죽을 때가 되었을 무렵 그곳에서 사라졌다는 말만 들었다. 아미의 몸에서 가끔 진드기를 잡아주었다. 아미의 피를 빨아먹으며 살았던 진드기는 그 모습 자체가 징그러웠다. 진드기의 몸을 팽팽하게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검붉은 피를 기억한다. ‘성혈로 씻어 주소서’라는 성가가 있다.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진 사람들의 피는 어떤 색깔일까. 하얀 피가 아닐까. 불교를 이 땅에 들여오려다 죽은 그의 목에서 흘렀던 하얀 피처럼.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죽은 사람들을 기릴 때 봉헌하는 하얀 백합의 색깔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