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리/책 요약

단순한 열정-아니 에르노

leibi 2023. 5. 26. 20:22

*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 갔다.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최정수, 문학동네, 2023, 17)

* 마지막으로 만난 날짜에서 멀어질수록 고통과 불안은 점점 커졌다. 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통보받지 못한 채 시간이 계속 흐르면 시험에 떨어진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듯이, 그의 전화를 받지 못한 채로 여러 날이 지나면 그 사람이 나를 떠난 게 틀림없다고 단정 짓곤 했다. (18)

* 부모와 자식은 육체적으로 너무도 가까우면서도 완벽하게 금지 되어 있어서 서로의 성적 본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무척 불편한 사이이다. (22)

* 내 열정의 근원을 알기 위하여 정신분석학자들이 하듯이 내 오래된 과거나 최근의 경험을 더듬어 찾아낼 생각은 없다. 나는 내 열정을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정당화되어야 할 실수나 무질서로 여겨질 수도 있다. 나는 다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27)

* 나는 나와의 관계가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28)

* 그 사람의 질투는 나에 대한 사랑의 유일한 증거라는 생각에, 나는 그 사람이 하는 말 중에서 질투의 증거로 생각되는 것은 탐욕스럽게 기억해 두려고 노력했다. (29)

* 여러가지 제약이 바로 기다림과 욕망의 근원이었다. (32)

* 자기가 겪은 일을 글로 쓰는 사람을 노출증 환자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노출증이란 같은 시간대에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는 병적인 욕망이니까. (36)

* 먼발치에서 그를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것이 견딜 수 없어서, 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그 사람과 마주치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40)

* 나는 그 사람이 곁에 없을 때조차도 상상과 욕망으로 대리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44)

* 이 기간 동안 나의 생각, 나의 행동은 모두 과거를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현재를, 행복을 향해 열려 있던 과거로 바꾸어 놓고 싶었다. (49)

*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립스틱을 고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52)

* 나는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일과 허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가늠해 보았다. 소설 속 인물에 대해서는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그때 내가 여길 지나갔지'하는 구절이 나오더라고 미심쩍은 감정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55)

* 글에는 자신이 남겨놓고자 하는 것만 남는 법이다. 써놓은 글을 찬찬히 읽어보니,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열정 속에서 하루 하루 살아갈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감정들이다. (59)

*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더라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66)

*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이것을 읽으리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그 사람이 내게 준 무엇을 드러내 보인 것뿐이다. (66) 
*****************************

* 자전적 예술이 활발해지게 된 이유: 
1. 거대담론이 사라지면서, 작가의 시선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구조에서 주체로 이동했다.
2. 평범한 개인의 낮은 목소리와 사소한 몸짓이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일상의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기 시작했다. 
3. 시선을 내면세계와 과거로 돌려 세상의 변혁에 아무런 힘도 미치지 못했던 소소한 개인의 내면을 응시하게되었다. 
4. 구체적 삶의 진정성이 담긴 작가들의 이야기가 호감을 일으켰다. 

* 부모의 천박한 언행과 옷차림은 천부적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라 극복할 수 없는 숙명이라 믿었던 작가는 1970년대 초에 접한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회학을 통해 물질적 기준에 의해 구분된 빈부의 구별법은 언어.생활방식.취향과 같은 비물질적 영역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 아니 에르노의 작품에는 하층민과 중산층 사이에 낀 경계인인 느끼는 불편한 자의식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 자신의 낙태 경험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첫 소설에서부터 그녀의 성과 육체에 대한 묘사는 성적 금기와 위선적 도덕률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자신이 인지한 갈등과 불만은 계급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정신분석에서 논하는 욕구불만과는 무관하다는 주장도 그런 태도를 뒷받침한다. 

*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소설을 쓰려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결국 사실에 근거한 진솔한 감정을 담담하게 서술하는 쪽을 택한다. 평생 궁핍한 소외를 겪었던 투박한 삶을 세련된 언어로 치장하는일은 자신의 뿌리를 배신하는 짓이라 생각해 인류학자의 객관성을 갖고 소위 '평평한 문제'로 아버지의 삶을 기록하는 전기 형식의 글을 쓰게 되었다. 
(<단순한 열정>의 해설, 이재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