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리/책 요약

여자아이 기억-아니 에르노

leibi 2023. 5. 23. 20:49

* 무리가 주는 행복이 모욕보다 더욱 컸기 때문에 그녀는 그들 곁에 남고 싶어 한다. 나는 그들을 무의식적으로 따라 할 정도로 그들과 닮기를 열망하는 그녀를 보고 있다. ... 결국엔 끔찍할 정도로 형편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말버릇을 따라 하는. (<여자아이 기억>, 아니 에르노/박수린, 레모, 2022, 90)

* 볼품없지만 변함없던 나의 꿈 때문에 현실이 내 기억 속에 비집고 들어올 수 없던 것이 틀림없다. (105)

* 자주, 나는 내 책을 끝마치고 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 생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출간에 대한 두려움인지, 완성했다는 만족감인지, 책을 다 쓰고 나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쓰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106)

* S를 떠나기전, 나는 마지막 이미지 앞에 멈춘다. 아이들이 기차역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고, 첫날의 고요가 갑작스럽게 성벽 안쪽에 다시 찾아왔으며, 그녀는 모든 걸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기 위해 시내로 걸어갔다.  자신이 태어난 이래 가장 행복했다고 확신하는 그 장소를 바라본다. 파티를, 자유를, 남자의 육체를 발견했던 장소. 그녀는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 (107)

* 과거에 있었던 현실을 포착할 때 기억의 신빙성을, 가장 확실한 기억일지라도, 의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만, 확고부동한 사실도 있다. 나는 S에서의 경험이 지닌 현실성을 내 몸에 영향을 미친 방식으로 파악한다. (123)

* 어떤 밤에는 공동침실 바깥 층계참에 있는 화장실 변기 위에 올라가, 센 강 쪽으로 난 지붕의 작은 창을 통해 좌안까지 흘러 내려가는 루앙의 불빛을 바라보기도 했다. 나의 연인이 거기, 어둠이 시작하는 그곳에 있었다. 고통스러웠던 것 같지는 않다. 내 꿈은 형태가 바뀌어 있었다. 다음 여름이 되면 방학 캠프에 가서 H를 다시 만나리라는 기대로 변해 있었다. (129)

* 사진 속 내 또래 남자들은 모두 머리가 하햫게 셌다. 나는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를 알아보았다. ... 찍힌 지 1년도 되지 않는 이 사진보다 더 현실적인 것은 없지만, 내가 보고 있는 것의 비현실성이 나를 놀라게 한다. (130)

* 우리는 다른 이들의 존재 속에, 그들의 기억 속에,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과 심지어 행동 속에 어떻게 남아 있는가? 이 남자와 보낸 두 밤이 내 인생에 영향을 미쳤음에도 나는 그의 인생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는, 이 믿기 힘들 만큼 놀라운 불균형. 나는 그가 부럽지 않다. 글을 쓰고 있는 건 나니까. (131)

*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무시무시한 생각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 자신이 초등교육에 부적합한 사람이라는 것, 마치 초등교사는 사회 전체의 도덕을 책임져야 한다는 듯 사범학교가 요구하는 교육자로서의 완벽함에 자신은 너무나 거리가 멀고, 그것에 아주 못 미치는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인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 시기에, 어떻게 그녀의 절망을 헤아릴 수 있을까? (167)

* 내가 결정하긴 했지만 내가 진짜 선택했다고 말하는 건 또 다른 일이야. 내가 선택한 이 진로에서 내가 형편없고 부족하다는, 이 진실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170)

* 그녀에 대해서 쓰기 시작했을 때, 무의식의 술책으로, 그녀에 대해 폭로할 권리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계속해서 미뤄왔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에 대해 쓰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게 허구의 이야기와 완전히 다른 점이다. 현실과 관련해서는 타협이 가능하지 않다. (198)

* 방학 캠프 장소로 되돌아가기를 원했을 때 나는 무엇인가를 느끼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1958년 여자아이와 얼마나 달랐는지를 증명하고 나의 새로운 정체성 -교수자격증을 따고 글을 쓸 예정인 똑똑하고 단정한 문학 전공 여학생- 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둘 사이의 격차를 헤아리기 위해서 돌아갔다. 내가 1958년의 여자아이와 더 이상 아무 관계도 없다는 걸 말해주기 위해 간 셈이다. 그리고 또, 내가 S에 되돌아가서 방학 캠프를 다시 보고자 했던 건, 써보고 싶었던 소설을 쓸 힘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같기도 하다. 그러므로 S를 경유했던 일은, 소설을 뜰 수 있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며 몬세라토 성모상의 발등에 내가 남긴 입맞춤이나 마차가지였던 것이다. (209)

* 1963년 여름, 내가 스물세 살이었던 여름에, 생틸레르뒤투베의 레스토랑 겸 호텔 '셰자크'의 천장이 목재로 된 방에서 나의 생물학적인 처녀성은 의심할 여지 없이 증명되었다. 나는 그의 이름 밖에는 알지 못했다. 필리프. 그가 나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에서 나는 그의 성을 읽게 되었다. 에르노(Ernaux). 

* 글쓰기의 가능성이 많아지는 건 우리가 경험하는 그 순간, 경험하는 것의 의미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 그 순간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지닌 무시무시한 현실성과 몇 년이 흐른 후 그 벌어질 일이 띠게 될 기묘한 비현실성 사이의 심연을 탐색할 것. (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