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영성/똘레제

피에르 부르디외의 죽음

leibi 2023. 5. 10. 16:31

자신의 출신이 조금이라도 피지배 계층과 관련있는 경우, 부르디외의 철저한 분석에 대한 지적 동의에 덧붙여 체험된 자명성을, 이를테면 경험이 보장하는 이론의 진실성을 느끼게 된다.... 십오년 전, 부르디외를 처음 읽었을 때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처음 읽었을 때, 두 저서가 미친 효력을 비교해보았다. 이쪽에서는 여성의 조건에 대한 각성이라면, 저쪽에서는 사회의 구조에 대한 결정적이며 돌발적인 각성, 그러한 각성은 고통스러우나 곧바로, 특별한 기쁨과 힘, 해방감, 고독감의 파열이 뒤따른다. 내게는 해방이자 세상에서 ‘행동해야 할 이유’의 동의어인 부르디외의 저작이 사회적 결정론에 대한 종속으로 인식될 수도 있었다는 점이 불가사의이자 슬픔으로 남는다.... 부르디외의 글들은 내가 글쓰기를 시도할 때, 무엇보다도 그가 명명한 대로 사회적으로 억압된 것을 지속적으로 말할 수 있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격려였다. ... 피에를 부르디외의 사회학에 대한 거부반응이 가끔 지나칠 정도로 격렬하게 표출되는데, 이는 그의 방법론 및 그것과 결부된 그의 언어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철학으로부터 넘어온 부르디외는 철학의 토대가 되는 개념들, 아름다움, 선, 자유, 사회 등의 개념을 추상적으로 다루는 방식과 결별하고 대신 구체적이고 과학적으로 연구된 내용을 그 개념들에 부여했다. 부르디외는 파스칼처럼 겉허울을 파괴하는 일에, 작용과 환상과 사회적 상상계를 드러내는 일에 열광적이어서 그의 연구른 전복의 요인들을 품게 되고, 나아가 직접 기획하고 연구팀과 공동으로 펴낸 가장 유명한 저서에서 세계의 비참을 입증함으로써 세계 변혁으로 나아가는 만큼, 그의 작업은 저항을 맞닥뜨릴 수 밖에 없었다. (<카사노바 호텔> “슬픔”, 아니 에르노/정해용, 문학동네, 2022, 97-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