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씀/생명의 말씀

안식일과 창조

leibi 2023. 1. 17. 11:42

"Il sabato e' stato fatto per l'uomo e non l'uomo per il sabato."(Mc 2,2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바리사이들과의 논쟁했던 안식일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내라"(탈출 20, 8-10)는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과 연관되어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창세 2, 2-3)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안식일(쉼)이 하느님의 창조와 관련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안식, 쉼의 의미는 무엇인가? 더 이상 더 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상태에서 고요하고 평화로이 머뭄이다. 이것은 하늘 위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느님, 초월자이신 하느님, 내재적인 하느님에게 가능한 말이다. 이런 하느님께서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시어, 육화 하신 하느님으로 되신 그때부터 안식과 쉼이라는 말이 아주 역동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예수님은 당신을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라고 지칭하시면서, 당신이 육화한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셨다. 세상에 들어오신 하느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 때문에 창조에 관한 의미 또한 달리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창조를 이미 완성된 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가는 역동적인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창조는 완성되었는가? 아니면 완성을 향해 나가고 있는가? 완성을 향해 나가고 있다면, 언제 완성되는가? 신학자들은 물론 일반 신자들이 수없이 많은 논쟁을 했던 질문이다. 그리고 이 논쟁은 신학자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과학자들과 역사학자들과 문화사학자들까지 개입하면서 지금도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고 있는 사안이다.

나는 그 많은 논쟁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 잘 모른다. 논쟁의 어느 편에 서서 내가 주장하는 바를 조리있게 설명할 수 없고,  나와 반대되거나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실력이 없다. 다만 하느님의 창조와 안식이 육화 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 예수께서 바라셨던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에 귀결되어 있음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언제 완성되고 이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에서 언데 쉴 수 있는가? 하느님의 나라는 육화 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과 더불어 이미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바로 그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시간과 공간 안에 살고 계시기 때문에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이미 그렇지만 아직'이라는 이 말을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고백록> 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주님, 당신께서는 위대하시고 크게 찬양받으실 분이십니다. 당신의 권능은 크고 당신의 지혜는 한량이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 당신 창조계의 작은 조각 하나가 당신을 찬미하고 싶어 합니다. 인간이란 자기 죽을 운명을 메고 다니며, 자기 죄의 증거와 당신께서 오만한 자들을 물리치신다는 그 증거를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래도 인간, 당신 창조계의 작은 조각 하나가 당신을 찬미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찬미하고 즐기라고 일깨우시는 이는 당신이시니, 당신을 향해서 저희를 만들어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을 합니다."(<고백록> 제1권 1장 1절) 그리고 성인은 다음과 같은 말로 <고백록>을 마무리한다. " 주 하느님, 저희에게 평화를 주십시오. 저희에게 모든 것을 베푸셨으니 정묵의 평화, 안식일의 평화, 저녁 없는 평화를 주십시오."(<고백록> 제13권 35장 50절)

우리는 예수님 당대의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밀밭에서 '길을 내어가며' 걸어가고 있다. 이 여정에서 주님께서 안식일이라는 외적인 규범과 더불어 그것이 원래 의미했던 것을 잊지 말라는 말씀을 새기며 사는 것이다.  하느님 말씀과 계명의 본래 의미를 깊이 깨달아, 그 말씀을 '지금 여기'에서 살아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유연하고 역동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습관과 규범과 전통이 우리를 짓눌러 숨을 쉬지 못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