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41)
'다시 봄'은 무엇인가 보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보았던 것을 잊고 있었거나 간과하고 있었거나 습관적으로 보면서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리코의 눈먼이는 무엇을 보았었을까요? 자기가 소경이 아니었던 때,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때였을까요?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하느님과 안에서 누리고 있었던 자유로움? 그것이었을 수도 있고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만으로 족하다며 살았던 태초의 자유로움과 충만함을 되살려달라는 간절한 염원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땅에 매여있어 자유스럽지 못하고,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살 수 없고, 그런 자신의 모습이 비참하게 여기며 살고 있는 자신의 상태를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상황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 달라는 염원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느님의 모든 말씀이 그러하듯, 땅에 살고 있는 우리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달리 다가오면서 우리에게 힘을 주고 빛을 주고 생명을 준다면, 오늘은 전에 눈먼이가 아니었던 때 드린 기도라기 보다는 말씀드렸던 것보다는 눈먼이로 살고 있는 살고 있는 사람의 기도로 이해하는 게 더 낫겠다 싶은 생각입니다.
'다시 봄'은 새롭게 본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자신의 과거를 덮어두고 있었던 먼지를 털어내고 그 아래에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본다는 말입니다. 과거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지금 현재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봄'은 새롭게 체험하고 있는 것을 추가하여 과거의 것을 낯설게 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은 새로운 체험의 연속입니다. 아무리 습관적으로 했던 행동이라고 하더라도, 아주 새로운 상태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지만, 그 체험이 과거 자신의 삶과 결합하여 현재 자신의 모습을 볼 때, 낯설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방식으로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총살형 집행 대원들 앞에 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아버지에게 이끌려 얼음을 발견하러 갔던 오후을 떠올렸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의 첫 문장이라고 합니다. 마르케스는 이 소설의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소설의 멋진 제목으로 더 알려진 이 소설로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는데, 이런 소설을 쓰기 시작하게 된 동기에 대해 ''불현듯, 할머니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라고 말했답니다.
자기 조국 콜롬비아에서 반복되고 있었던 혁명과 혁명의 역사를 다른 관점에서 쓰지 않으면, 그 폭력과 피흘림의 늪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조국의 역사를 '할머니의 눈'이라는 다른 관점에서 써보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참된 혁명을 이루는 것이고, 성공한 혁명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마르케스가 가졌던 '할머니의 눈'으로 보려는 삶의 태도는 믿는이들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자신의 삶과 세상을 보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언제 어디에 있던 예수님과 함께, 그분이 보았을 법한 눈으로, 그분이 살았던 삶의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지난 날 자신의 어리석음과 현재 자신의 비참함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땅의 사람이고 육에 짓눌려 있는 낡은 사람이지만 항상 새로운 것과 더불어 '다시 태어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