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영성/Spicul

음악을 완성하는 춤, 춤을 돋보이게 하는 음악

leibi 2022. 4. 30. 21:32

<음악,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이지영, 글항아리, 2021

"안무가 안성수-무용이 음악의 언어가 될 때"(279-305)

 

* 음악이 움직임을 담고 있습니다. 음악은 또한 시간의 흐름을 담고 있습니다. 춤은 귀로 들은 것을 움직임으로 풀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듣는 것이 중요하고 그래서 다양하게 듣습니다.

 

* 바흐 음악을 자주 사용했던 안무가 나토 두아토는 "춤과 음악은 영혼을 치유하는 음식"이라고 했는데, 음악과 춤은 나를 치유해줬던 '종교'같은 것입니다. 누구에게가 '젊음'이라는 것은 힘들었을 텐데, 음악과 춤은 젊을 적 내가 잘 지낼 수 있도로 끌어준 중요한 지지대였습니다. 

 

* 한국인은 음악에 특별한 감각을 타고났어요. 본인들을 잘 모르지만 해외 무용수들과 비교해도 선천적이다 싶은 부분이 만죠. 단지 큰 그림에서의 틀이 없으면 불안해 하는 경향이 있어요. 어떤 면에서는 '제스처', 춤동적이 아닌 특정 포조를 취하는데 약한 것이죠. 춤에는 음악을 듣고 느끼고 그것을 춤동작으로 표현하는 것 외에 작은 몸짓, 제스처들이 중요할 때도 있거든요. 

 

* 현대의 일반인들은 자극적인 시선에 많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특히 한국 대중의 눈은 가장 예쁘고 가장 잔인한 것들에 노출되어 있어요. 오히려 무용하는 사람들보다 눈도 귀도 더 자극적인 것들을 평균적으로 많이 봐왔고, 이미 자극적인 상태에 가 있는 거죠. 어느 것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잘라지겠지만, 최선을 다해도 만족시킬 수 없는 대중화라는 기준은 위험해요. 

 

* 한국 관중은 음악을 좋아해요. 무용도 어느 정도 관심이 있고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TV에서 가장 예쁘고 가장 잔인한 것들을 자주 보기 때문에 현대무용은 그것과는 차별되는 지점에서 특별해야 합니다. 본인이 못 봐왔던 것이라든지, 못 봐와서 두려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못 봐왔던 건데 그게 재미있어서 또 보러 간다는 지점을 잘 찾아야 하죠. 모든 취향에 시선을 맞출 수는 없겠지만, 어떤 형태의 현대예술이든 자기 작품을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 관객과의 공감을 만들어 낸다면 다행이고,  아니면 고립됩니다. 

 

무엇이 부끄러웠는지 모르지만, 부끄러움 때문에 춤을 춰보지 못했다. 테레비나 영화에서 춤추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혼자 방에서 '막춤을 추라'고 하지만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몰라 그만둬버리곤 한다. 혼자 막춤을 춘다고 정신이 이상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하려는 경향은 무엇 이유일까 궁금하다.

 

몸으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내려놓고, 감성과 몸자체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야 하는데 지금까지 이성 중심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지 않않을까. 춤은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보다는 표현하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 분야인 것 같다. 물론 춤을 춰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춤도 우리 몸속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소리와 움직임을 따라야 할 것 같다. 우리 몸속에 얼음처럼 얼어붙어있는 것을 몸 동작을 통해 풀어주면서 몸과 정신과 영이 해방될 것이다. 문제는 말과 상상으로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표현해 보는 것이다. 

 

상당히 오래 전에 외국 선교사 신부님이 당신의 나라에 가셔서 '전례춤'이라는 것을 배우고 돌아오셨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부님은 마른 나무처럼 뻣뻣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 당신이 배우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라고' 허락했다. 신부님께서 미사 전례 때 춤을 추면서 입장하시는 것을 보면서, 주변 사람들은 모두 ㅋㅋㅋ. 당신 나름으로 열심히 하고는 계셨지만, 로봇이 춤추며 입장하는 줄 알았다. 그때 그 신부님이 좀더 우아하고 멋지고 아름답게 춤을 추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그것을 보고 춤을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부쩍 일어나지 않았을까. 아니 춤을 춰보고 싶은 마음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그때 기본적인 것만이라도 배웠더라면 좋았을텐데하는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