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진노를 푸시고 재앙을 거두어 주소서.
수녀님들 공동체의 3분의 2가 자가체크 결과 양성이라는 소식 들었습니다. 한두 명 양성 판정받은 것과 크게 다른 심리적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양성 판정자들이 자가격리에 들어갔기 때문에 공동체 생활이 불편할 것입니다. 자가격리하고 있는 분들에 대한 돌봄으로 공동식사와 기도 등의 일상생활이 모두 흐트러져 버렸을 것입니다.
2년 전, 우한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확산 되었고, 우리나라도 이로부터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대도시와 소도시를 중심으로 확산 되고 있는 동안에도 이곳은 비교적 청정지역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코로나로부터 빠져나오는가 싶었는데, 처음보다 더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확진자로 밝혀져도 그런가 보다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코로나에 둔감해진 것도 있었지만, 내 주변에 확진된 사람이 없었고 내가 양성판정으로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 확진자가 나오고 내가 양성으로 확진되었을 때 문제는 달라집니다. 오미크론이 그 전의 코로나와 달리 걱정할 정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렀습니다.
수녀님들의 소식을 듣고 바로 2년 전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2020년 3월 27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이었습니다.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저녁 시간이었고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대성전 입구 앞에 제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제대 옆에는 로마 산 마르첼로 알 코르소 성당에서 모셔 온 <기적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1522년 로마에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시민들이 이 십자가를 들고 로마 시내를 돌면서 기도하자 페스트가 서서히 물러갔다는 십자가입니다. 평소라면 사람들로 꽉 차 있었을 베드로 성당 앞 광장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비가 내리고 있는 베드로 광장에서 제대를 향해 혼자 걸어가셨습니다.
침묵 속에서 홀로 기도하신 다음, 그날 선택한 복음(마르 4,35-41)말씀으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호소하셨습니다. “... 벌써 몇 주 째 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짙은 어둠이 우리의 광장과 거리, 도시를 뒤덮었습니다. 이 어둠은 모든 것을 마비시키는 숨 막히는 침묵과 공허로 채우면서 우리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우리는 두려우며 길을 잃었습니다. 마치 복음의 제자들이 뜻하지 않게 만난 거센 돌풍으로 모두가 당황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같은 배에 타고 있으며 연약하고 길을 잃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우리 모두가 함께 노를 젓고 서로에게 위로가 필요하다는 중대한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배 위에 우리 모두가 있습니다...” 그리고 홀로 기적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셨고, 아무도 없는 광장을 향해, 그렇지만 전 세계를 향해 성체로 강복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미사 독서에서 모세가 주님께 말씀드렸던 것을 듣습니다. “주님,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큰 힘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당신의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십니까? ... 타오르는 진노를 푸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던 축복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탈출 32,11-14))
2년 전, 그날 교황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내렸던 성체의 축복이 사라졌을까요? 아닙니다. 그 축복으로 우리가 2년을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 축복과 함께 코로나 희생자들이 하늘나라로 올라가셨고, 그들의 가족이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의료진과 봉사자들이 희생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일반 시민들은 생활의 불편함을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모세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현장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지 않고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 외진 수도원에서 침묵으로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수녀님들 또한 자신을 위한 기도와 더불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모세처럼 중재의 기도를 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이들 모두가 모세와 함께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의롭고 죄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럴까요? 그럴 수 있지만, 그보다는 자비로운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희망 때문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의 기도를 귀를 기울여 들으십니다.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는 호의로 우리를 재앙으로부터 지켜 주십니다. 그래서 역경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 없음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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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크론은 코로나 델타보다 힘이 약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적당한 치료제와 도움받을 수 있는 약도 있다고 하니, 걱정하지 마시고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양성이든 음성이든 수녀님들의 불편함과 일상의 삶을 주님께 봉헌하면서 지내시길 바랍니다. 저와 저희 공동체도 수녀님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