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영성/똘레제

늙어감-자기소외

leibi 2022. 2. 18. 21:40

A가 오래전부터, 눈가에 노란 반점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사로잡히는 실톱으로 갈리는 것처럼 느끼는 고통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 가장 밑바닥에는 물론 늙어감이 똬리를 틀고 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몸의 퇴화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아야만 하는 심정이랄까. 곧 내가 '나 아닌 나'가 되는 깊은 충격이 노화의 진실이 아닐까. 젊은 시절에는 당연하다고만 여겼던 게 돌연 낯설기만 한 것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자기소외, 곧 오랜 세월동안 지녀온 젊은 나와 거울에 비친 늙어가는 나 사이의 불일치이리라. 그러나 소외를 느끼는 바로 그 순간, 똑같은 시간의 흐름에서 A는 거울을 응시할 뿐 화를 내지는 않는다. A의 친구가 이렇게 썼다. '더는 내 얼굴을 미워하지 않으리'. 그러나 A는 친구와 달리, 적어도 그 친구가 묘사한 것과는 달리 자신의 얼굴이 싫을 뿐만 아니라, 얼굴이 자신으로부터 소외 당해 낯설게 여겨질 뿐만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아니, 그 이상이다. 어떤 불쾌함도 없이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얼굴을 '잊어버린 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그런 과거가 과연 그녀에게 존재했던가? 얼굴이 세계의 부분이었떤 때가 있었다. 그 때에는 그 세계에 그녀가 속했으며, 다시 세계가 그녀의 것이었다. 어떤 모순도 없이, 아무런 애매모호함 없이 얼굴은 나의 일부인 얼굴은 곧 나 자신인 동시에 세상이었다. 그때는 아직 자기 자신에게 소외되지 않았으니까. 이게 늙어가는 사람이 겪는 근본 체험이다. 늙어가는 사람은 오로지 인내심을 가지고 거울 앞에 서기를 고집한다. 이로써 노란 반점과 탈수증에 쫒겨나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운다. 타인의 습관적인 평가를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 평가에 굴복하지 않는 그런 용기 말이다. (<늙어감에 대하여>, 장 아메리/김희상, 돌베게, 2021, 61-67)

 

할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잘 모른다는 말이다. 그것에 대해 오랜동안 숙성시킨 것이 없다는 말이다. 자주 들었지만 건성으로 들었고,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나이듦과 늙음 그리고 이들의 종점에 있는 죽음 같은 것이다. 최소한 이런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이것들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것들이 내 가까이 있고 친하게 지내야 할 것들이며, 진지하게 다루어야 하고 이것들과 거리를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 뿐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이것들을 가능한 피할 수 있는데 까지 피하고 외면하며 지내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어떤 것들이 도움이 될까? 품위있게 나이듦, 아름다운 황혼, 멋지고 거룩한 죽음 등에 대한 연구라도 해야 할까? 삶이란, 더구나 자신의 삶은 연구 대상이 아니다. 자신의 삶은 씨름해야 할 것이며, 다른 사람의 삶은 관찰의 대상일 뿐이다. 나이듦과 늙음에 대한 과장된 미화와 조건없는 긍정과 강요하는 듯한 수용 또한 도움이 되지 못하며, 이와 반대로 전적으로 비관적인 태도 또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것들처럼 현실적인 것이 없다는 것이다.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그들의 민낯이 드러나게 되면 누구든 소스라쳐 놀랠 정도로. 이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기가 껄끄럽고 두렵더라도, 그리고 언젠가 그들과 함께 친해져야 하고 그들을 지나 죽음 속으로 사라질 처지라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과 달리 살려는 각오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아메리는 늙어감이라는 삶의 선물인 자기소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과 죽음 앞에 의연하게 설 수 있는 것을 저항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늙어감을 지나 죽음을 뚫고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은 아메리가 말하는 그 저항하는 힘을 믿음의 어둠으로 들어가는데로 돌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