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영성/똘레제

나이듦(늙어감)에 대해

leibi 2022. 2. 16. 21:02

"젊어서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은 늙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누구도 젊어서 죽고 싶지 않으며, 아무도 늙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허망함,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헛헛함, 자기 자신을 갉아먹어 들어가는 우리 존재의 심호한 차원이 곁들여지면서 더할 수 없이 선명한 진리로 울림을 남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이는 곧 우리 존재의 부정인 동시에 '존재하지 않음'으로 향해 나간다는 뜻이다. 명백한 진리인 탓에 그 어떤 이성적 위로도 발가벗겨지고 마는 황량한 삶의 지대가 '늙음'이다. 그 무엇도 계획하지 말아야 한다. 늙어가며 우리는 세계가 사라지고 오로지 시간만 남은, 내면만 덩그러니 끌어안은 의미가 된다. 나이를 먹으며☞ 우리는 우리 몸이 낯설어짐과 동시에 그 둔중한 덩어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가깝게 느껴진다. 인생의 정점을 넘겨버린 우리에게 사회는 스스로 그 어떤 일도 계획하지 못하게 몰아세운다. 나이를 먹어가며 우리는 결국 죽어감과 더불어 살아야만 한다. 그야말로 괴이하고 감당하기 힘든 부조리한 요구다.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만 하는 굴욕이랄까. 우리는 그저 겸손을 강요받은 굴종으로 늙어 죽어가는 자신을 바라볼 뿐이다. 치유가 불가능한 병의 모든 증상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감염된 죽음이라는 이름의 바이러스가 벌이는 알 수 없는 작용 탓으로 빚어진다. 젊었던 시절, 바이러스는 독성을 발휘하지 않았다. 그런 바이러스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제 나이를 먹어가며 죽음이라는 이름의 바이러스는 잠복해 있던 은신처에서 빠져나온다. (<늙어감에 대하여>, 장 아메리/김희상, 돌베게, 2021, 209-210)

 

☞ 나이듦(늙어감)에 대해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나이들어감에 대해 말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회피한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입니다. 그것이 두려워서라기 보다는 어찌 해 볼 수 없이 무력한 상태로 나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가 씁쓸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이듦을 회피하고 있었지만 어느 날 이 나이듦이 죽음을 동행하고 자기 눈 밑까지 다가왔음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나이듦이 동반하고 있던 이 죽음 자기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함께 있었고, 바이러스처럼 자기 몸과 삶 곳곳에 잠복해 있다가 갑자기 실체를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삶이든 뭐든 새롭게 시작할 수도 없습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정도가 너무 깊어 회생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한다'라는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를 직간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하고 있었던 혹은 했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 되돌아 볼 여유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눈 앞에 도사리고 있는 나이듦과 죽음이 주는 압박감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이지만 이보다 더 답답한 것은 나이듦과 죽음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되는지 모르며, 그 누구도 그에 대한 답을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과 충고와 권고와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맨 마지막 순간에는 자기 혼자 남아 자기 삶에 대해 응답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듯이, 죽음 또한 그러할 것이라고만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