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글/영혼의 동반

사계절의 숲 그리고 침묵

leibi 2022. 1. 15. 22:11

나와 함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자”(마르, 6, 31). 주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따르기 위해 저희 예수고난회 창립자께서는 수도원을 한적한 곳에 짓기를 원하셨습니다. 창립자의 이 말씀 덕분에 지난 3년 동안 강원도 양양 산속에 있는 수도원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수도원 뒷편에서는 대청봉이 보이고, 주변 산길을 걸을 때 멀리 동해가 언뜻언뜻 보이는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받은 축복이 많았습니다.

 

길가에 있던 돌멩이와 풀과 꽃과 나무와 곤충과 새와 들짐승이 제 눈에 들어왔고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에서 싹이 돋고 벌레가 쏠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숲속의 살아있는 것들이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는지, 그렇지만 죽어야 할 때에는 미련 없이 죽는 모습을 보면서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살기 위해서는 자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천천히, 부드럽지만 날카롭게 보는 방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때가 되면 오고가는 사계절의 변화, 그 어떤 변화에도 고요하게 계시는 침묵 자체인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개나리가 피고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면 봄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산골의 봄은 이보다 조금 일찍 시작됩니다. 주변 야트막한 산에서 눈이 녹기 시작할 무렵, 습하고 응달진 계곡에 복수초(福壽草)가 필 때입니다. 혹한의 겨울을 지낸 들에서 핀 꽃이라 꽃이 작을 것 같지만 의외로 큽니다. 백 원짜리 동전 크기만 하고 색깔도 아주 진한 노란 꽃입니다. 행복과 장수를 보장한다는 이렇게 멋진 이름을 가진 복수초가 피는 것을 시작으로 얼러지와 처녀치마와 노루귀의 작지만 앙증맞은 꽃들이 피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봄이 시작됩니다. 산수유와 생강나무와 진달래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들꽃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핍니다.

 

왜 이렇게 많은 꽃들이 한꺼번에 필까? ‘봄이 되었으니까 그렇지 뭐라고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햇볕이 나있는 시간이 매일 평균 얼마이고 이런 날이 몇 일간 계속되고, 몇 도 이상의 온도가 몇 일 이상 지속될 때 등등을 들이대며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추운 겨울을 견뎌낸 결과이고 겨우내 땅속 깊은 곳에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나뭇잎과 꽃이 일시에 솟아 나오는 잔치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잔치의 기쁨이 너무 커서 이곳 산속에서 살고 있는 저에게까지 전해지는 것이겠고요. 그래서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며,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 1, 12)라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마음 깊이 이해하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꽃봉오리가 터지는 소리와 꽃잎이 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고요한 산골에 요란하고 날카로운 예초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이곳이 한 여름 속으로 들어와 있다는 표지입니다. 시골과 산골에 사는 것이 잡초와 전쟁하는 것임을 실감하는 계절입니다.

 

여름숲에서는 양보와 배려, 협조와 협력, 공존과 상생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풀과 나무, 곤충과 벌레들은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고 지속시키기 위해 처절하고 집요한 싸움을 피하지 않습니다. 이 싸움 속으로 사람도 뛰어들어야만 합니다. 예초기를 앞세워 풀과 잡초와 어린 나무를 가차 없이 잘라내고 짓이겨야 합니다. 이렇게라도 해서 자기들만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풀과 잡초들을 막아내야만 합니다.

 

여름은 특별히, 봄에 심은 꽃모종과 어린 나무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때입니다. 이들이 풀인지 잡초인지 구분이 안되고 잘라내야 하는 나무인지 보호해야 할 나무인지 구별이 안되는 이들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모종과 나무들을 예초기의 희생 제물로 봉헌하지 않으려면 이들 주변에 어떤 표시를 해두어야 합니다. 작은 것을 가엾게 여기고 보호하려는 이런 마음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창세기 4장에는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왜 죽였는지 그에 대한 명확한 이유는 없습니다만,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벌을 내립니다.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벌이었습니다. 그러자 카인이 하느님께 말씀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떠도는 자기를 보면 죽이려 할 것이라고, 그래서 두렵다고. 이 말을 듣고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표를 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그를 보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는 표지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해 주셨던 것을 본받아 어린 꽃모종과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지줏대를 세우고 철망으로 보호해 주어야 하는 여름입니다. 이런 작은 행위를 통해 무자비하게만 보이는 여름숲을 생명 가득한 곳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양양에서는 소나무가 아닌 나무는 나무로 취급해주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때가 많습니다. 그만큼 소나무가 많다는 말이고 숲에 관한 일들을 소나무 중심으로 처리합니다. 실제로 2년 전 간벌할 때 일하는 분들이 소나무가 아닌 활엽수들을 거의 모두 잘라내 버렸습니다. 가을이 되어도 이곳에서 단풍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소나무 하면 사철 푸른 나무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나무도 단풍이 들고, 그 단풍의 아름다움은 다른 활엽수의 단풍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활엽수의 단풍에는 벌레가 쏠고 비바람에 찢긴 잎들이 많은데 소나무 단풍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늘 모양의 수많은 잎 중에서 병들었거나 망가진 잎은 보이지 않습니다. 단풍 색깔도 맑고 밝고 투명하고 화려합니다. 노란색과 황금색과 갈색이 함께 있고 이것이 푸르디 푸른 잎들과 조화를 이루어 정말 매혹적입니다. 소나무 잎이 주는 날카로움이라는 좋지 않은 인상을 순식간에 바꾸어 버립니다. 언제나 푸르며 부러질지라도 굽히지 않는다는 강직함과 절개, 그리고 다양한 색깔로 조화를 이룬 멋지고 아름다운 단풍든 소나무를 싫어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완전한 것은 백 퍼센트 날카롭고 백 퍼센트 부드러우며, 백 퍼센트 희고 백 퍼센트 검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완벽하게 구비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완전함에 가까이 가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이런 사람을 성숙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부드러움과 날카로움, 흼과 검음, 빛과 암흑, 여성성과 남성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사람입니다. 가을숲의 단풍 든 소나무에서 이런 성숙함을 보고, 소나무처럼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교회의 성인성녀들이 말씀하셨던 많은 영적인 주제를 묵상하기 위해 겨울처럼 좋은 계절도 없습니다. 겨울산과 겨울숲은 영적인 공간입니다.

 

겨울은 살아있는 모든 것이 사라지는 혹독한 계절입니다. 벌레와 곤충과 들짐승이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풀과 나무의 잎과 줄기는 생존을 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더 이상 싸우지 않습니다. 싸움이 멈춘 겨울숲은 적막함 그 자체입니다. 살아있는 것들이 내는 소리가 사라진 그곳을 바람이 채웁니다. 겨울 바람은 풀잎과 나무 모양이 제 각각이듯 저마다 다릅니다. 소리의 강도가 다르고 불어오는 방향이 다르고 사라지고 흩어져가는 곳도 다릅니다. 태풍이 몰려오고 먼 바다의 파도 소리처럼 들리고 들짐승이 사그락거리고 자동차가 달려오는 것처럼 들립니다. 겨울숲에서 부는 바람과 함께 발가벗겨짐과 홀가분함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겨울숲은 보이지 않는 생명으로 가득 찬 곳입니다. 싱그럽고 화려하고 풍성한 봄과 여름과 가을의 생명과 그의 덧없음을 통과한 생명입니다. 겨울눈(冬芽)에서 이런 생명을 보게 됩니다. 겨울눈의 어둠 속에는 보이지 않게 웅크리고 있는 새싹과 꽃잎이 있습니다. 다가올 여름의 강렬한 햇볕과 뿌리까지 흔들어 댈 폭풍우를 견뎌야 할 어린 생명입니다. 죽은 듯이 서 있는 마른 풀잎 또한 함부로 할 수 없는 생명의 위엄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람에 휘어지지만 다시 꼿꼿하게 일어서는 풀잎의 기개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겨울 숲에 생명이 가득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눈 뜨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수없이 많은 겨울눈이 있고 수없이 많은 마른 풀잎이 하늘을 향해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명으로 가득 차 있고 흑백 사진처럼 아주 선명한 겨울숲으로 들어갑니다. 다른 나무와 하나 되기를 완강하게 거부하듯 적당한 거리를 두고 고집스레 서 있는 나무들 사이에 섭니다. 바람이 지나가는지 낙엽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 소리 때문에 그곳에 침묵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숲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그 침묵으로부터 나와 그 침묵으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막스 삐카르는 침묵 속에서 일 년 사계절은 변해간다. 봄은 겨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부터 온다. 겨울도 그리고 여름도 가을도 그러하다.”라고 말합니다. 사계절의 순환과 변화가 어떠한 눈도 본적이 없고 어떠한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1코린 2,9), 침묵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고 그 하느님께로 되돌아 간다는 의미입니다. 사계절 숲의 침묵과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 침묵을 통과한 말들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며 한 그루 나무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서 있습니다

<기쁨과 희망> 28호(2021년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