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살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덤으로 추위까지 받았습니다. 제설작업할 때 아무렇게나 밀어놓은 눈더미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바람으로 창문틀이 흔들립니다. 춥습니다. 무릎담요를 합니다. 손가락이 시립니다. 손가락만 나온 장갑을 끼고 타이핑 작업을 합니다. 작업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콩나물과 야채 돼지고기 찜을 먹었습니다. 그런 음식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기름기가 빠진 돼지고기와 야채로 아주 맛있었습니다. 음식과 어울리는 술은 보약이라면서 포도주 한 잔을 마셨습니다. 내일부터 피정자들이 들어오시기 때문에 도로 사정을 파악하러 나갔습니다. 제설작업이 끝나 길은 뚫렸지만, 응달진곳에는 눈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우체부 아저씨도 눈 때문에 올라오지 못하고 산밑에 두고 간 우편물을 찾아 왔습니다. 눈과 코만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추위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바람소리때문에 발에 눈이 밟히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멀리 검고 푸른 바다가 보였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검고 푸른 색깔이 더욱 더 선명해집니다. 바람으로 눈발을 모두 떨어낸 소나무의 푸름이 서늘합니다. 다시 편지작업을 했습니다. 기계적인 작업이지만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아침기도와 미사때 성당이 추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옷을 많이 껴입고 성당에 갔습니다. 서늘함으로 머리가 맑아지는 듯 했습니다. 바람이 잦아들고 고요한 침묵만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침묵안에 머무는 것 자체가 좋았습니다.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있든, 슬픔으로 가득하든 주님은 오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그냥 지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습관적이고 전례적인 것 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족들에게 밀린 안부 전화를 했습니다. 간단한 안부를 물으면서 이 세상에 있음을 확인합니다.
혈육으로 맺어진 인연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면서 간접체험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느끼는지 느끼고 있지않는지도 모르는 배우자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을 보면서 고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게 됩니다. 고통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은 고통입니다. 그래서 고통받는 사람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환자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자기의 무기력함에 대한 고통 때문에 그리하는 것입니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환자와 그런 환자를 보고 있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신을 보는 것은 슬픔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합니다. "제 속에는 사는 데 대한 지독한 권태도 있고 죽은 데 대한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제게서 그를 앗아간 죽음을 더 미워하고 흉악한 원수처럼 증오했습니다만, 죽음이 그를 없애버릴 수 있었으니까 순식간에 모든 사람을 없애버리디 않을까 생각해서 두려기도 했습니다. 그때 제가 전적으로 그랬음을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고백록> 제4권 6장 11절) 아픈 사람에게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메세지가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괴로움때문에 약한 사람에게 강하게 대합니다. 아픈 것이 환자 자신의 탓인 것처럼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런 말과 행동이 환자를 더욱더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하고 있는 자신의 초라함을 보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혈육으로 맺어진 인연은 버릴 수가 없습니다. 풀려날 수가 없습니다. 혈육이든 아니든 인연으로부터 벗어나기는 매 한가지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오죽했으면 불가에서 인연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수행의 목표인 해탈이라고 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