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약자
자기 몸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몸이 아프면 정신도 혼미해지고 마음도 산란해진다. 가끔 병원에 가서 쉰다는 말을 듣는다. 병원에는 아픈 사람이 가는 곳이고, 아픈 상태에서는 아픔과 고통과 싸우는 것인데, 쉰다는 것을 말이 안되는 소리다. 몸이 아픈 다음에 치료하기 보다는 예방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건강할 때는 자기 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몸에 이상이 있어야 그때 몸에 대해서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은 온통 자기 몸가꾸기에만 관심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자기 몸이 아파도 관리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자기 몸에 대해 둔감한 사람도 있다. 자기 몸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이 자기 몸을 해치려 해도 무방비 상태로 있거나 거부하고 반항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 존중과 자긍심이 낮은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자기 몸이 부서지든 말든 일하는 사람이 있다. 심하게 표현하면 노예처럼 일하는 사람이다. 살기 위한 방책이겠으나 그런 사람을 보면 슬퍼진다.
지하철에 보면 '교통약자석'이 있다. 이분들이 교통약자인 것은 사실이나, 이분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자리는 꼭 노인과 장애인들만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고 하는 홍보 문구를 몇 일 전에 보았다. 어떤 이유로든 자기 몸과 정신과 마음과 어려움이 있는 사람, 혼잡한 지하철에서 조금이라도 의지할 곳이 필요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라는 말이겠다. 어찌 '교통약자'만 있을까? '삶의 약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이들에 대한 배려까지 생각할 때 성숙하고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삶의 약자'들에 대한 배려고 그들을 게으르게 하고 역차별이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자기 주변에 '삶의 약자'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들에게 뭔가 의지처가 되어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한두 번만이라도 체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약자들에게는 열외 조항이 많이 적용된다. 교회에서는 이것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이라고 말한다. 우선적으로 돌보아야 할 사람이고, 보통 사람들에게 당연하게 요구되는 것을 요구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최악의 상태에 떨어지기 전에 뭔가 방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그런 사람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