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젊은이의 슬픔
지금은 애기들을 자주 만날 수 없습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본당이나 피정집에서 애기들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애기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힘들지만, 애기들을 보면서 많이 웃기도 했습니다. 애기들에게 사탕을 줍니다. 애기들에게 과자를 줍니다. 양손에 사탕과 과자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에게 맛있게 보이는 사과를 줍니다. 이럴 때 아이들이 보이는 반응은 사뭇 다릅니다. 어떤 아이는 사탕과 과자를 모두 버리고 사과를 덥석 받습니다. 어떤 아이는 사탕과 과자와 사과를 번갈아 바라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입니다. 세가지 것에 대한 망설임과 혼란을 견딜 수 없어 울어버리는 아이들고 가끔 있습니다.
이것이 아이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어른들에게도 선택과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선과 악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에 대해서는 갈등과 혼란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선한 것들 사이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 때는 갈등과 혼란이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와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젊은이의 마음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영원한 생명에로 가는 길을 묻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일상에서 지켜야 하는 계명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살인과 간음과 도둑질과 거짓증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젊은이는 그 모든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네가 갖고 있는 재물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젊은이는 양손에 사탕과 과자를 갖고 가늠질하고 있는 애기와 같이 되었습니다. 한손에는 재물과 명예와 성공과 자기 계획과 화려한 미래 등을 쥐고 있고 다른 손에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것을 쥐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망설이고 갈등을 겪고 혼란스러워 하는 그 젊은이를 보고 계십니다. 젊은이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것을 포기하고 다른 손에 있는 재물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슬픈 얼굴이 되어 떠납니다.
우리 삶의 선택과 결정의 연속입니다. 우리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선택과 결정이 작은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선택을 할 때 기준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방식으로 선택하고 결정합니까. 사람들은 대부분 지금까지 살았던 방식대로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습관과 몸에 배어있는 방식에 따릅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삶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난 선택과 결정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즐겨 먹었던 사람이 언제부턴가 초호화 호텔에서 식사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렇게 몸에 밴 습관에 따라 결정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욕망과 욕구와 욕심에 따라 선택과 결정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경우든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선택만 하는 것을 욕심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언젠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리를 보면 포기함없이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선택만 했기 때문입니다. 해도해도 너무한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하는 탐욕스런 일들을 보면서, 실망과 낙담뿐 아니라 비애감과 허탈함과 어이없다는 마음 등으로 복잡해집니다.
이들에게 지혜이신 하느님을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지혜 앞에서는 진흙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지혜 7,7-9)라는 말씀이 어떻게 들릴지 궁금합니다. 주님께서는 매순간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특히 당신과 관계되는 일의 선택과 결정에서는 어느 때보다 가까이 계십니다. 개인의 욕심과 몸에 밴 인간적인 습관에 따라 선택하기보다 그분의 가르침과 말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용기과 지혜를 주시도로 청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