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Nulla
"신부님께서는 마음을 굳게 하시고 신부님의 행동이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굳게 믿으십시오. 제가 말씀드린 기본적인 덕목을 한층 더 사랑하십시오. 다시 말해, 마음의 겸손입니다. 아무것도 갖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며,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Nulla avere, Nulla potere, Nulla sapere)" 창립자 십자가의 성 바오로께서 조반니 마리아 치오니 신부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1757년 8월 25일) 아무것도아닌 사람처럼 살라는 말씀입니다. 살아있지만 죽은사람처럼 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어떤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떤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어떤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우리는 자기드러냄과 자기과시와 자기표현과 자기주장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도구와 수단을 동원하여, 자기가 아무것도아닌 어떤사람이라는 것을 알립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 비해 뒤쳐진 사람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살고 있지 않는 인생처럼 여기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아닌 사람처럼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창립자의 말씀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그 말씀대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신분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니다."(필리 2, 6)
창립자께서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아무것도아닌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어떤 것을 소유함으로써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시고 무한한 힘을 갖고 계시지만 십자가의 무력함과 죽음을 선택하신 예수님과 함께 내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행세하려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의 주인이시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온전히 지금여기에 충실하셨던 예수님과 함께 자기 자신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지금여기에 현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되는 것입니다.
어떤사람이 되고 어떤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것도아닌 사람으로 사는 것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아무것도아닌 사람으로 사는 데서 오는 자유로움과 행복과 기쁨과 멀리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급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