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영성/성인성녀.교부

십자가 고통의 예수님

leibi 2021. 9. 10. 22:42

왜, 고통에 대해서 그렇게 강조하셨던가요? 한 명의 형과 열명이 넘는 동생들의 죽음을 보면서 그렇게 되었던가요? 당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었던 가난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생활의 어려움을 보면서 그렇게 되었나요? 당신 나름으로 인간 고통에 대한 체험이 있었던 것은 사실일 것처럼 생각됩니다. 신앙도 신앙이지만 한 인간으로서 고통에 대한 어떤 답과 그것을 극복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를 찾고 있었던 것도 사실일 것 같고요.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가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고통으로부터 어떤 응답을 원했지만, 그 누구도 답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고통에 더 많은 관심이 갔던가요? 예수님의 고통에 대한 것이었던가요?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보면서, 당신도 고통을 당하면서 예수님의 고통안에서 무엇인가 찾아보려는 노력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대중신심이 고통받는 예수님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체험없이도 십자가의 예수님에 대해 강조할 수도 있었을테고요. 고통에 대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지금까지 그것을 그냥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 모든 말을 건성으로 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이 힘을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현학적인 표현이 낯설었기 때문에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지금 우리가 즐겨쓰는 표현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그저그런 말씀으로 받아들인 적도 많았고, 수도회 설립이라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일을 하시면서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3백년의 시간과 지리와 문화의 차이를 감안해야 한다는 것은 머리일 뿐이고, 현실적으로는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도 많았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이런 질문과 고민은 벌써 몇 십년 전에 했어야 하는 것들이고, 그것에 대한 답을 벌써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았어야 할 것입니다.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시간을 구심점이 없는 상태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아오스딩 성인이 말씀하신 것처럼 '너무 늦게야 당신을 사랑'한 것도 아니어서 안타깝습니다. 고통에 관한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깨달았던 것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집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언젠가 속으로 지금까지의 생활이 당신께 대한 사랑때문에 한 것으로 해주십요라고 말했습니다. 억지로라도 당신께 대한 믿음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창립자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