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영성/똘레제
흑산-입도한 날
leibi
2021. 7. 11. 21:36
흑산에 들어온 첫날, 정약전은 넋 빠진 입을 벌리고 오랫동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울에서 흑산이 없었듯이 흑산에서는 서울이 없었다.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돌아가려는 마음의 찌꺼지가 남아 있어서 바다 너머 쪽으로 눈길을 끌어갔는데, 그 너머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흑산>, 83) 섬 사람들은 물가에 밀려와 바위를 끌어안고 모래 바닥을 핥는 물결을 바다에서 죽은 사내들의 넋이라고여겼다. 넋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바다를 건너와서 살던 마을의 가장자리에 매달리고 그 물가를 핥아먹을 수가 없을 것이었다. (<흑산>, 87)
☞ 흑산에 도착한 날, 정약전은 자기가 살아서 흑산을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거야'라는 실같은 희망, 허황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든 섬에서 나가지 못하는 것과 정약전 자신이 섬에서 빠져 나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엄청난 차이이다. 섬 사람들에게는 그곳이 삶의 터전이겠지만, 정약전에게는 보이지 않은 창살이 쳐진 감옥일 뿐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