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씀/생명의 말씀

카인의 표시

leibi 2021. 6. 28. 10:31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창세 4,15)

지난 초봄에 느티나무 10그루와 은행나무 10그루를 심었습니다. 느티나무는 5년생이고 은행나무는 3년생입니다. 20-30년 뒤의 이 나무들의 모습과 이 나무들과 함께 어우러져 있을 주변 풍경을 상상하면 심었습니다. 은행나무는 뿌리내림이 좋아 10그루 중에 8그루는 튼튼하게 자라고 있고, 한 그루는 실갱이를 하고 있고, 한 그루는 어제 자리를 옮겨 다시 심었습니다. 느티나무는 뿌리내림이 좋지 않았습니다. 10그루 중에 4그루가 잘 자라고 있습니다. 심을 때는 모두 똑같은 나무처럼 보였는데, 어떤 나무는 살아남고 어떤 나무는 죽었습니다. 죽어가는 나무를 보면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람과 햇빛과 온도와 물과 토질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 어린 나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실제적인 것은 모르고 있었기 때문 속무무책이었습니다. 죽어가는 나무에게 미안했습니다.

이곳 숲길 주변을 양양군에서 해 줍니다. 6월과 8월에 길옆의 제초작업을 합니다. 비가 오고 난 후나 태풍이 지나간 다음에 쓸려나간 길을 복구해 줍니다. 제초작업을 하면 이발한 것처럼 숲길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숲길 옆에 핀 들꽃들이 가차없이 잘려 나갑니다. 숲길을 걸으며 꽃을 보는 즐거움이 사라집니다. 꽃들은 날벼락을 맞는 거겠죠. 필요한 일이지만 안타깝습니다.

몇일 전에 예초기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군청에서 보낸 사람들이 풀깎기 작업하는 소리입니다. 마음이 급했습니다. 몇 일 전부터 미루었던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지난 봄, 길옆에 심어놓은 은행나무 주변 풀을 손으로 깎고 그 주변에 나무가 있다는 표시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풀속에 있는 은행나무가 예초기에 가차없이 잘려나게게 됩니다. 작업하는 사람들이 지나간 뒤에 은행나무가 그대로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카인과 아벨에 관한 이야기가 창세기 서두에 있습니다. 형인 카인이 아우 아벨을 죽입니다. 무슨 이유에서 그런 일을 했는지 확실치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형벌을 내립니다. 그 형벌 중에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벌이 있습니다. 카인이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떠도는 자기를 보면 죽이려 할 것이라고, 그래서 두렵다고.

카인의 이런 말을 듣고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하느님을 흉내내어 은행나무를 위해 표시를 했습니다. 그 표시를 보고 제초작업하는 사람이 은행나무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은행나무가 살아남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당신이 자녀라는 표시를 해 두셨습니다. 하느님의 영적인 표시를 세례 때 받습니다. 그 표시를 보면서 악의 어둠이 우리에게 덤벼들지 못합니다. 우리를 지켜주는 표시입니다. 사제가 서품을 받을 때 영적인 표시를 받습니다. 그 표시를 보면서 삶에서 만나는 어둠과 악이 그를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매일 긋는 성호경.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자기에게 다짐하고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고 증거하며, 어둠과 악에게 경고하는 행위입니다. 아주 간단한 행위지만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성호경을 어찌 함부로 그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