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음
주님께서 썩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썩는 씨앗처럼 살라고 하십니다. 의미와 의도를 이해할 수 있지만 실행하기는 엄청 어렵습니다. 씨앗은 자기가 썩어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아도 썩습니다. 식물에게 의식이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은 최소한 그렇다라고 여깁니다. 사람은 다릅니다. 의식하지 않으면 썩을 수 없습니다. 의도적인 노력과 행위가 따르지 않으면 썩을 수 없습니다. 씨앗이 썩는 것을 보면서 자기도 그랬겠거니 착각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전통적인 영성생활의 가르침에서 썩음은 거의 항상 순명이라는 맥락과 함께 합니다. 순명하는 행위가 곧 썩음이라는 것입니다. 순명한다는 것은 자기 의지와 계획과 의도를 내려놓는다는 것입니다. 고유한 자기이기를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말 할 것도 없고, 인간적인 고통과 고뇌가 동반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말합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통해서 순명하는 것을 배우셨고, 순명하는 사람'이 되셨다고. 썩음의 삶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은 주님의 십자가 길과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겨냥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그분의 삶 전체가 자기 의도를 이루려하기 보다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이루려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썩음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다른 생명에로 건너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넘겨주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이 더 옳은 표현입니다. 자기가 썩어 없어지면서, 자기의 생명이 연장되는 것입니다. 나만을 위한 생명이 아니라 더 넓고 큰 생명이라는 영역, 생명이라는 바다라는 맥락에서만 조금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새로운 생명이 솟아나고 있습니다. 새싹이 나오고 꽃들이 피고, 새들이 날고 노래합니다. 이 모든 생명체가 고통과 어둠과 썩음이라는 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썩은 나뭇잎이 내는 향기와 흙과 뒤섞여 있을 때의 포근함. 썩음이 새로운 생명을 위한 장소임을 바로 깨닫게 해 줍니다. 자기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게 썩고 죽을 수 있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