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아님
그리스도안에서 매우 사랑하는 아들이자 나의 제의방지기인 그대여, 제가 직접 답장을 쓰지 않아서 전혀 불만이 없거나 약간 불평을 하고 있습니까? 오, 저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대의 사랑이 저의 노쇠한 나이와 지병을 가엾게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직접 편지를 쓰지 못했던 제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이 쪽지를 씁니다. 그대는 아직 젊기 때문에 모든 덕행을 실천하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당부합니다. 노녀의 냉기는 나뭇잎도 떨어뜨리고 젊은 나이에 결실을 맺지 못하는 이는 늙은 나이에도 아무것도 못합니다. 저는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저도 열매를 맺고 싶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습니다. 더 이상 기력이 없어 성당에도 발을 질질끌며 겨우 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용기를 내십시오. 그대의 아무 것도 아님,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아무 것도 갖지 못함, 아무 것도 알지 못함의 싶은 심연속에 머물러 계십시오. 그대의 아무 것도 아님만 있는 곳에 머무십시오. 그렇게 생활한다면 참된 진지를 배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본성상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에 창조되지 않고 영원한 신성의 심연이 그대의 아무 것도 아님을 송두리째 빨아들이실 것입니다. 하느님으로 되어가는 삶, 거룩한 삶, 아주 거룩한 생활을 하십시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길 부탁합니다.
*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일흔한 살이었을 때, 자기 제의방지기 수도자에게 쓰신 글이다. 어떤 사람인지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으나, 아주 젊은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지금으로 말한다면 신학생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 젊은이에게 수도회의 창립자이자 최고 장상으로서라기 보다는 수도생활의 선배로서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준다.
아무 것도 아님.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이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으시대며 살지 말하는 말씀이시다. 아무 것도 아님을 깊이 자각한다고 하여 세상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아님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