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길
돈암동 신학원에서 살고 있었던 때의 일입니다. 제법 오래 된 일이죠. 신학원에서 기르는 개가 한 마리있었는데, 학생들이 '껄떡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죠. 하고 많은 좋은 이름 중에 왜 껄떡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을까? 이 개의 특성 중 하나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현관 문 앞이나 주방 문 앞에 납작 엎드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먹을 때가 되면 벌떡 일어나 길길이 뛰고 밥을 가지고 가는 학생들에게 달려 들어 밥을 빼앗아 먹곤했습니다. 챙겨준 밥을 먹고 다시 현관이나 주방 문 앞에 납작 엎드려 다음 밥시간을 기다리는 것이었죠. 그 개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시간이었습니다. 이 껄떡이가 한 번은 신학원 좁은 마당에서 나무에 앉아있는 새를 잡으려고 쏜살같이 달려가다가 제법 높은 신학원 옹벽 밑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배가 고파서 새를 잡으려 했는지 모르겠지만, 옹벽 끄트머리에서 멈추지 못하고 허공을 그대로 달려간 것 같았습니다. 옹벽에서 떨어져 정신이 빠진 껄떡이가 놀래서 골목 아래로 냅다 도망갔고, 이 껄떡이를 찾으로 학생들이 동네를 쏘다녔던 일이 있었습니다. 본능에 아주 충실한 껄떡이였습니다.
제가 껄떡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이런 껄떡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본능에 충실하고 그것이 충족될때만 살아있다고 느끼는 거죠. 오늘 복음에서는 레위라는 세리를 통해서 우리 몸속에 있는 다른 유형의 껄떡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레위. 레위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저와 우리들은 레위를 세관장으로서 돈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했던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자신의 동족과 주변 사람들을 모질게 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돈을 좀 모았던 것 같고요. 그렇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자기 직업 때문에 저질를 수 밖에 없었던 크고 작은 잘못에 대한 회한 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에 대한 욕망, 굶주림과 허기짐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 마음속에 있지만 양립할 수 없을 것처럼 생각되는 이 두 가지 욕망으로 레위의 몸과 마음은 자주 혼란스러웠을 것이고 심지어 분열되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되어 있지 않고 분열되어 있는 이런 상태를 우리는 비참하다고 표현합니다. 레위는 외적으로 풍요로웠지만 내적으로는 고갈되어 있고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몸속에는 껄떡이들이 있고, 레위들이 있습니다. 내 몸속에 도사리며 살고 있는 이들은 나에게 몸속으로 다른 많은 껄떡이들과 레위들을 데리고 옵니다. 복음에서는 이것을 많은 세리와 죄인이라고 표현하고 있는거죠.
구원받는다는 것. 구원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비참함에서 시작됩니다. 레위 자신과 레위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자기의 비참함을 자각한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사람이고 분열되어 있는지 깊이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구원은 시작됩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자신의 힘과 노력만으로 구원될 수 없고, 구원의 길을 걸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필요할까요?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피상적인 만남이 아니라, 아주 깊고 깊은 만남, 몸과 정신과 영혼까지 파고드는 만남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어떠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오늘 독서의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질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 4, 12)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문자로 씌어진 성경 말씀을 뜻하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우리의 살과 영과 혼과 생각과 마음을 꿰둟고 오셔야만 우리가 구원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몸속에는 껄떡이들이 있고 레위들이 있고 죄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선느 이런 우리들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니다. 구원자이시고 해방자이신 그분께서 내 몸과 영과 생각과 정신속까지 파고들어 오시어 나를 정화시키고 구원해 주시기를 청하는 시간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