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라너 인터뷰
* "교수님, 오늘 날에도 순교자가 필요할까요?"
"순교자의 시대가 소원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확신 때문에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은 있는 법이지요. 다만 나로서는 오늘 날에도 목숨을 값으로 치를지언정 조건없이 확신을 주장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칼 라너-그는 누구였나>, 칼 라너.마이놀트 크라우스/정한교, 분도출판사, 1991, 49)
☞ 칼 라너가 선종(1984년 3월 31일)하기 전 독일 제2텔레비젼에서 했던 대담(1979년)을 책으로 만든 것이다. 자기 목숨을 걸고, 생명을 바치면서 까지 고수할 가치가 있는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은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것이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이데올로기든. 물론 순교하는 것은 자기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말한다. 자기 목숨으로 믿음을 증거하는 것인데, 그 믿음이 자기 노력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 "하이데거의 철학이 교수님의 신학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사유하는 양상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당연시 되는 여러가지 배경을 다시 한 번 과감하게 캐물어 들어가는 방식에 있어서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신학에다가 현대철학을 이끌어들여 관련지으려는 노력에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미 하이데거의 가르침을 더러 받은 것이 사실이고 또 그래서 늘 감사하게 여기고 있는 터이지요."(58)
* "교수님 생각으로는 바티칸이 얼마만큼 더, 좀 더 명백히 국사사회주의에 대해했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 비장한 열정을 가지고 무서운 자부심을 드러내며 여론의 모든 차원을 사로잡았던 국가 사회주의라는 현상, 그것은 물론 나로서는 역사철학적으로나 사회정치적으로로나 설명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그런 집단적 광란의 시대는 도무지 설명이라는 게 되지 않았요.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아는 사람들만 해도 개인적인 인품이나 윤리생활은 전혀 나무랄 데 없는 사람들이면서도 매우 오래도록 또는 전쟁에 깊이 빠져들어갈 때까지 국사사회주의가 독일 민족의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런 사람들이 있었어요.. 나중에 와서는 물론 으례 그때 사람들이 비겁했다고들 말할 수 있고 또 혹시 그런 판단이 옳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나로서는 오늘날 젊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군요. 지금 이 시대안에 살아라. 또은 원컨데 너희들일랑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만일 너희들도 그런 일을 겪을 수 밖에 없게 된다면, 어디 보자, 그러면 너희들은 그때 우리들보다 훨씬 더 사물을 똑똑히 볼 줄 알고 더 과감하게 행동하여 훨씬 더 목숨을 내걸어 놓고 살는지... '히틀러 현상', 그런 원시인이 그런 매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더구나 교양있는 도덕군자라는 사람들에게깢도 먹혀들어갔는지, 하여간에 그게 나로서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란 말입니다." (64)
☞ 옳고 그름이 확연하게 드러난 지난 시간에 대해 평가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 지극히 정당한 것이고 옳은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난 지금의 싯점에서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할 때 혼란속에 빠지게 된다. 과거의 잘못된 행동과 판단과 결정에 대해 그때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최선이었다는 말로 용인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먼 훗날 어떻게 평가되기를 바라기보다, 자기 양심과 보편 윤리의식에 따라 행동해야 할 것이다. 신앙인이라면 여기에 하느님의 가르침이 첨가되어야 할 것이고.
* "라너 교수님의 신학은 합리성이라는 특성을 띠고 있는게 아닐까요?"
"신학에 있어서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아무리 치밀하게 또 아무리 과감하고 예리하게 생각을 해도 넉넉지는 못하다고 하겠는데, 이 점을 가리켜 '합리성'이라고 부르겠다면, 내 신학이 합리성을 띠고 있다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하겠습니다. 가톨릭 신학은 그것이 불가사의한 하느님의 신학이고자 할진데 또 당연히 신비를 고려해야지요. 그러나 전통신학은 아직도 더 생각해 나갈 수 있는 거기서 여기가 신비의 시작이고 선언해 버리고, 너무나 간단하게 신학의 개별 문제에서 무슨 신비같은 걸 들먹이곤 한다고 봐요."( 72)
☞ 하느님의 신비에 대해 인간의 지성으로 따지고 있을 때까지 따지고 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이 해야 할 바를 하지 않고 하느님의 신비에 자기 일을 떠맡기는 게으름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
* "교회 교도직에 의하여 선포된, 최종적 구속력이 있는 교의라도 원칙적으로 앞을 향하여 열려 있다. 하나의 교의가 생생하게 살아 있기 위해서는 거듭 새삼 재해석되어야 하며, 이리하여 언제나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참으로 여러 해석 가능성이 허용되는 것이다."라는 말씀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하나의 교의가 그 본연의 의미, 그것이 본디 뜻했던 의미에 있어서 왜곡 또는 부정되어서는 안된다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나는 믿고 있어요. 하지만 어느 교의나 항상 새로운 신학적 노력에 의해서 철저히 재고되고 다른 맥락들 속에서 생각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교의는 앞을 향해 열려 있다는 것, 그것 또한 당연한 일이지요... 로마의 교도직에게 당연히 인정되는 것, 그것이 정상적인 신학자에게도 그의 과업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당연히 허용된다는 말입니다."
☞ 그리스도교의 기본 진리에 대한 설명과 표현양식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일을 하는 신학자들이 자기이 견해를 자유로이 발표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인물이 되어 자체에서 썩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것은 신학 분야 뿐 아니라 삶의 모든 과정에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본질과 그것이 드러나는 현상과의 괴리감과 긴장과 갈등은 항상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