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지만 죽은
쉴만큼 쉰 것 같다. 새벽에 잠깐 눈이 떠졌고 그런 상태가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일어나는데 큰 어려움은 없이 가볍게 일어났다. 밤에 보일러를 때지 않은 상태여서 그랬던 것 같다. 더우면 깊게 잠을 잘 수 없는 사람이다. 아침 식사 후에 잠깐 산책했다. 낙엽이 이슬에 젖어 있어 사그락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곳에는 신갈나무와 굴참나무가 반반 섞여 있는 것 같다. 숲교육 때 참나무를 구별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알 수 있다. 낙엽. 지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고, 떨어진 잎들이다. 내년 봄에 다시 솟을 새로운 잎들이 있으리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서 자연의 흐름에 맡긴 것이다. 지난 번 배운 낙엽의 구멍안 부분을 통해 성모상과 돌에 새겨진 ‘함께 좀 쉬자’라는 것을 찍으려 해보았지만 촛점을 맞출 수가 없었다. 촛점이 자꾸 낙엽에만 밎추어져 버린다. 꼭 빨래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 어제 밤 담가놓은 빨래를 했다.
쉴만큼 쉬었다. 지금까지 기도하고 있었지만 좀더 진지하게 정신과 마음을 모아 기도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사 독서 묵시록의 말씀에 마음이 끌린다. 살아있다고 하지만 죽은 것이다. 육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에 대해 말하고 있다. 육적으로 매일 먹고 마시고 잠자고 쉰다. 그렇지만 거지까지 일 뿐. 영적인 생명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면 죽은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 언제 영적인생명을 받은 것인가. 태어나는 순간부터이며, 숨어있는 생명이다. 깨어있으리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 영적인 생명을 자각하고 있으라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하느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심을 의식할 뿐 아니라 이것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있는 자각. 이렇게 할 때 깨어있는 것이며, 영적인 생명과 더불어 있는 것이다.
육으로 살아있지만 영적인 감각이 죽어있을 때, 매순간 오시는 하느님을 알아 차릴 수가 없다. 그래서 도둑이 언제 올 지 모르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깨어 있으라, 하느님의 현존을 자각하며 살라는 말씀이다.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무엇에 대해 그렇다는 말인가. 냉정과 열정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어떤 정에 대해 냉정하게 대해야 한다. 얼음처럼 차갑게 대하지 않으면 혼란스럽게 된다. 이런 냉정으로부터 열정이 시작된다. 열정이 있을 때 냉정하게 된다는 말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열정이 지나치면 욕정으로 된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무엇인가 자기 것으로 하려는 것을 욕정이라고 한다. 이런 욕정으로 가득할 때, 비참하게 되고 가련하고 가난하게 되면,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로 된다. 냉정과 열정과 욕정을 거치면서 혹은 그런 과정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려는 하느님안에서 깨어있으려는 하느님께서함께 하고 계심을 자각하려는 순수한 열정, 순정이라고 해야한다. 뜨겁게 된 열정과 욕정이 정화된 순정. 그것으로 가득차 있는 영의 사람이다.
영은 사람의 몸 한 가운데 있으며, 사람을 떠나 있지 않다. 손가락 끝에 있으며, 머리카락에도 있다. 시간과 공간으로 특정할 수 없는 특성을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에 매여있는 감각적인 것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육과 영은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이다. 그러나 구별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을 육체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영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 영으로 둘러싸인 육적인 인간, 그래서 신비적인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