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ibi
2020. 9. 28. 22:22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하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않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이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넘게 살았다는 기분은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 이병률 -
☞ 알고 있고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보는 것은 신비입니다. 아주 평범한 그래서 간과하기 쉽고 눈에 띠지도 않는 일을 자각할 때는 놀람입니다. 매일 밥을 먹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고단함을 견딜 수 있음은 성실함입니다. 몸에 날개가 없어 날지 못하지만 생각으로 하늘을 날고, 과거에서 미래로 순식간에 오갈 수 있는 것은 신비입니다. 신비로움은 우리 삶 어디에나 있습니다. 현실과 신비가 엉켜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아름답고 고통스러운 우리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