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영성/똘레제

하느님께 가까이

leibi 2020. 9. 16. 21:22

* 우리가 하느님의 무한한 신비 안으로 더욱 깊이 잠기고,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더욱 활력에 넘치며, 성령과의 친밀한 관계가 내적으로 더욱 깊어질수록 세상의 악도 한층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감각이 희미해질수록 악에 대한 이해도 그만큼 더 모호해집니다. (<쇤보른 추기경과 다윈의 유쾌한 대화>, 크리스토프 쇤보른/김혁태, 생활성서, 2017, 138)

성인들이 살아 계실 때 '자기는 죄인'이라고 말한 것은 하느님께 다가가면 갈수록 자기의 죄스런 모습이 그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더불어 살고 그리스도의 현존안에서 사는 것은 악에 대해 예민해 진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과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악에 대한 감각도 둔해집니다. 사람과 자연에 대해 거리낌 없이 폭력을 행사합니다. 

 

* 창조가 시작, 되어감, 목적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면, 창조주가 '한처음에 창조하셨다'는 말은 그러한 과정의 시작을 열었다는 의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그 과정 중에 있고, 아직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140)

그 자체로서 완전한 창조였고, 매순간 완전함의 상태에 있지만, 하느님의 온전성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에서 창조는 진행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매순간 당신의 영을 보내시오,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 발걸음을 활기있게 해 주십니다.

 

* 하느님께서 '자연들의 공화국'을 창조하신다는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은 그리스어로 '퓌에인' 이라 부르는 일, 다시 말해 발생과 되어감의 과정을 겪습니다. 이 과정은 더듬거리고 시도하고 실패하고 부서지고 협력하고 투쟁하는 일과 이해할 수 없는 소멸, 그리고 좋든 나쁘든 뜻밖에 나타나는 부작용들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145)

인간의 죄스러움과 악행과 하느님을 거스리는 일까지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할 때 우리는 희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용인하라는 말이 아니고, 그것에 좌절하는 말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 소나무 한 그루가 수백 년을 살면서 수천 킬로그램의 씨를 생산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성공에 이르는 씨앗은 단 하나에 불과합니다. 거센 바람이 늙은 나무 하나를 쓰러뜨리고, 거기에 새로운 공간이 생겨날 때 분이지요. 그때까지 나무는 새와 멧돼지와 곤충들에게 먹이와 안식처를 제공합니다. 끝없이 일어나는 이 소멸이야말로 생명의 미래를 확보하기 위한 발판과도 같습니다. 소멸은 살아있음의 표지입니다. 모든 생명은 불완전하 사라져 가지만, 그럼에도 창조주의 마르지 않는 생명력을 반영합니다. (146)

이곳에서 보이는 나무의 90%는 소나무입니다. 너무 많아 그냥 한 그루의 나무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제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역경과 시련과 위험한 시간을 통과한 나무들입니다. 엄마 소나무에서 수정이 되고, 씨로 성장하여 땅에 떨어진 씨앗들이 모두 발아하고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거의 대부분 없어진다고 봐야 합니다. 엄마 소나무가 쓰러질 때까지, 수십년 동안, 어떤 나무 어떤 씨앗은 수백년 동안 이런 과정을 되풀이 합니다. 내가 한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숨을 쉬고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듯이, 나무들도 그런 과정과 시간을 통과하여 내 눈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나와 나무의 인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