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함과 비겁함
서로 상대를 적당히 두려워하는 상태가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어 평화를 유지하게 한다. 우리 인간은 무슨 까닭인지 자꾸만 이러한 힘의 균형을 깨고 홀로 거머쥐려는 속내를 보인다. 그러나 내가 그동안 관찰해 온 자연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자연에서 제일 먼저 배울게 있다면 약간의 비겁함이다. (최재천, <숲에서 경영을 가꾸다>)
☞ '두려워 한다'. 상대방을 무서워한다, 어려워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서워 해야 할 사람들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가끔 봅니다. 예전에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모습입니다. 좋습니다. 배우는 사람이 스승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무서워 할 스승이 없습니다. 학생들과 제자들을 엄하게 대하는 스승도 별로 없습니다. 가끔 학생들 위에 군림하려는 스승에 관한 소식들을 접하곤 합니다. 슬프고 씁쓰러운 일입니다. 환자를 무서워하는 의사들이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의사의 인격과 의료기술이 함께 가면 좋으련만 기계 앞에 앉아 있는 환자만 있습니다. 인술이라고 자비를 베푸는 일이었는데, 자비는 오간데 없고 돈만 오고가는 사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교우들을 무서워 하지 않는 성직자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우들에 대한 무한정한 책임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교우들을 오도하는 성직자들이 많이 보입니다.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두려워하는 것이 없다는 말은 자신이 판단 기준이고 행동 기준이며 삶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자신감과 확고부동한 삶의 태도가 좋지만, 폭력적인 방향으로 나갈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그 사람속에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비겁함'. 동물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지만, 인간에게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함이라고 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은 당당함과 의연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만 하는 세상에서는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비겁하게 여겨지더라도 한 발자국 물러서고 자기를 '쿨'하게 낮추는 삶의 자세가 인간 관계를 원만하게 해 줍니다. 자기의 당당함과 떳떳함과 의연함만을 내세운다는 것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