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ibi 2020. 7. 19. 16:16

"눈을 감습니다. 몸에 긴장을 푸시고요. 마음의 짐과 걱정에 잠깐 내려놓으세요. 정신을 모읍니다. 숲 속에 서 있음을 의식하세요. 그리고 숲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 잘 들어보세요. 들리는 그 소리에 마음을 집중합니다. 다른 소리도 들리는지 들어보시고, 그 소리에 집중하며 잠깐 서 있겠습니다."

 

<송이밸리>에서 숲교육을 하면서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던 주문이었습니다.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감각기능이 청각에 집중되어 있었겠지만, 자연에서 들려오는 소리, 매미소리, 이름을 모르는 새소리, 바람의 소리 등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바로 옆에서 아이들이 떠들며 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숲의 서늘함과 상쾌함은 손과 팔과 얼굴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숲에서 들려올 수 있는 소리에 대해서는 상상만 할 뿐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소리를 들으라'고 말합니다. 그럴듯하고 매력적인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 말에 대해 조금만 생각하게 되면 많은 질문이 떠오릅니다. '마음'이 당연히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 마음이 어디에 어떻게 있는 거지. 마음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말하는데, 지금까지 그런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 소리를 알아차리지. 무슨 소리를 들었다 치자, 그 소리를 들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이지 등.

 

기도를 지도하는 사람은 이런 모든 질문에 설명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설명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질문도 있지만, 설명을 해 주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하는 사람이 질문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자신의 체험에서 얻어야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기도를 지도하는 사람은 기도를 먼저 시작했던 사람으로서 가르침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도하는 사람이 그 가르침을 스스로 실행하면서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 가게 해주는 사람일 뿐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게 하는 훈련의 하나가 감각을 예민하게 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숲교육 선생님이 하셨던 것과 같은 방법을 통해 감각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에서 감각 훈련이 중요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기도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에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이해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람을 육과 영의 단일체라고 합니다. 사람은 육이 없이 영으로만 존재하거나 영 없이 육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과 영의 단일체인 몸을 지니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사람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그리스도교에서는 이것을 '하느님의 말씀이 육이 되셨다'라는 아주 짧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도 생활의 궁극 목적인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보이는 물질세계 안에 그분이 계심을 아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마음과 영혼 안에도 그분이 계심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의 수행과 관련시켜 말한다면, 외적인 감각을 통해서 내면에 계신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고, 내면의 하느님이 물질세계를 통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런 이해를 전제로 기도생활에서 감각훈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오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반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오감 중에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생활하면서 오감에 대해 크게 주의하지 않습니다. 많은 주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감각활동에 대해 의식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매순간 감각 기능을 의식하면 살 수도 없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감각 기능이 예민하고 되고 섬세하게 할 훈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각 기능이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내적 기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기도할 때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감각기능을 훈련한다는 것은 깨어 있는 상태로 대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외부에 있는 사물을 건성으로 대하지 않고, 정신과 마음을 집중하여 대하고 감각의 한 부분으로만 대하지 않고 자기의 전 존재로서 대한다는 것입니다. 감각훈련은 시력을 보호하고 증진하며 청력을 예민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외부 대상을 대하는 내적인 태도를 바꾼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감각훈련으로 바뀐 이 내적 태도는 다시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게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의 움직임에 대해 예민하고 섬세하게 감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마음에서 '들었다'라고 하는 말이 기도하는 사람이 만들어 낸 말이 아닌가. 혼자 묻고 대답하는 독백과 무엇인 다른가라고 묻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을 '들었다'라고 하는 것에 대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들었다'라고 하는 말이 자신이 지어낸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인가. 이런 문제에 관련된 것을 식별이라고 합니다. 이런 식별에 관한 것에 대해서는 다는 곳에서 말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식별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에 대해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니 계신 곳이 없습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당신의 모상으로 만드신 사람의 마음, 영혼 안에 확실히 계십니다. 영혼안에 계신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을 찾고자 하는 갈망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갈망으로부터 기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이런 갈망을 주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대화 상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이 하느님과 대화한다는 말은 자기의 영혼안에 계신 하느님과 대화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양파처럼 여러 층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이야기할 수 있고, 자신의 상상력과 추리력 안에서도 하느님과 얼마든지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인간적인 요소가 섞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이 '들었다'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 그것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온 말씀인지, 자기가 지어낸 말인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었던 말을 그대로 되뇌고 있는 것이지, 구별을 해야 하는데 이것을 식별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숲교육에서 하신 선생님의 바랬던  것처럼 숲에서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것은 주변에서 아이들이 떠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감각훈련을 하기에 적합한 여건이 안되었던 것입니다. 감각훈련을 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소음이 어느 정도 차단된 장소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내적인 감각을 되살아 나게 하여 어느 곳에서든 감각훈련을 하여 내적인 감각을 깨어나도로 하는 것입니다. 내적인 감각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그것을 영적인 감각이라고 바꾸어 불러도 괜찮을 것입니다. 영적인 감각을 일깨우기 위한 방편으로 감각을 훈련하는 여러 가지 방법론들이 많이 있는데 이것을 참고하여 이 수련하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