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ibi 2020. 6. 25. 21:42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윤동주 -

 

☞ 어릴 적 어두운 우물을 내려다보며 두려워했습니다. 두레박이 우물 속 물에 떨어지는 길지 않은 시간이 아득하게 여겨졌습니다. 사람이 없는 산속 샘물가에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땅속에서 끝없이 솟아 나오는 물이 신기했습니다. 산새 소리와 풀숲을 뒤척이는 들짐승과 함께 있었습니다. 지난 겨울 산길을 걷다 길 한가운에 우윳빛 흙탕물이 고여있는 곳을 보았습니다. 바람이 조금 불고 있었고 바람결에 물이 흔들렸습니다.  물 위에 주변 나무 그림자가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멈추자 희뿌연 물속에 하늘이 나타났습니다. 예루살렘 수도원에 있는 저수구를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동생 요셉을 밀어 넣었던 바로 그런 우물이었습니다. 끝이 모를 새카만 입구가 무서웠습니다. 그 속에서 두려워 우는 어린 요셉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마음속 우물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궁금합니다. "순수한 정신의 소유자는 슬픔을 알지 못하므로 천사는 샘물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비로소 눈물을 흘릴 수가 있는 것이다." (<예찬>, 미셸 투르니에/김화영, 현대문학, 2014, 266) 미셸 투르니에의 말대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일까. 아니면 요셉처럼 두려워하는 모습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형체도 비출 수 없을 정도로 혼탁하고 출렁이는 마음을 지닌 분열된 모습일까.